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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2차 + 자캐

[원펀맨]염세주의자는 히어로의 꿈을 꾸는가?

사람은 무력하다. 그리고 무관심하다.

이것은 내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부모님의 가게일이나 도우는 인간이 무슨 경험이냐고? 당신의 비옷음이 바로 그 증거다. 당신은 분명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경험을 했는지는 관심도 없겠지. 설사 알고싶다고 해도 그것은 동정의 탈을 쓰고 그럴 듯 하게 꾸민 호기심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설령 그게 아니라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 무엇이 바뀔 수 있을까? 남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도 결국 마지막에는 갈 길 잃은 자기 자신만이 남겨질 뿐인데…. 

아아, 물론 혼자서도 잘 해나가는 멋진 사람들도 계신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그들 개인에게 한정된 능력. 막말로 재능이나 재력, 혹은 그 이상의 인맥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성질을 크게 거스를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그 보잘 것 없는 인간 중의 한 명인 것이다. 내가 인류의 평화에 대해 고민한다고 해서 전쟁터에서 불을 뿜는 총구가 사라지지도 않고 지구 반대편에서 1초 단위로 굶어죽어가는 아이들이 구원받지도 않는다. 나 따위에게 허락된 일은 인생의 무대에 화려하게 올라 살아가는 이들을 곁눈질하며 뒷편의 어둠에서 먼지나 들이마시는 것 뿐.

그러니까.
그래서.
그것 뿐이냐?

지금 내 옆에는 세 명의 초등학생이 있다.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있지만, 자신들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면 자신들의 것이라면 저런 식으로 하수구 구멍 사이로 떨어뜨릴 듯 말 듯 하는 위험천만한 장난을 칠 리 없으니까. 그리고 횡단보도 건너편에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이쪽을 쳐다보는 아이가 하나. 아마도 저 아이의 것이겠지.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옆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취하는 행동은 없다. 신호등은 빨간색. 초록불로 바뀌려면 좀 더 오래 기다려야한다. 귓가에 꽂아놓은 이어폰의 음익이 서정적인 반주로 바뀌고, 그 틈을 노리듯 아이들의 목소리가 쑤셔박혀왔다.

-야, 이걸 이렇게 하면…
-…자식 안 건너… 뭐…냐?
-신호 기다…는 것 …?
-발 동동 구르… 좀 봐라!
-야, 쟤 우는 ……데?
-대박! 푸하하!

…그래서, 뭐냐?
나는 뭐가 하고 싶은거냐?

신고라도 하고싶냐? 아이들을 불러서 꾸중하고 폰이라도 뺏고싶은거냐? 인간따윈 무력하고 무관심하고, 지금도 옆에서 들으면서 가만히 서 있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주제에? 무리다.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애초에 주변에 있는 어른도 신경쓰고 있지 않잖아. 그냥 장난으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면 될걸 왜 그렇게까지 신경쓰는거냐. 정의의 사도 흉내라도 내고 싶냐? 자기 일로도 코가 석 자인 주제에?

이렇게 속으로 곱씹는 동안에도 아이들의 놀림은 이어진다. 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 나는 겁쟁이다. 무력하다. 공연히 주변을 돌아보며 다른 누군가가 나서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움직임은 없다. 차량용 신호등이 오렌지빛을 내뿜었다. 여길 건너면 더 이상 이 꼬마들과 마주칠 일도 없다. 그래, 이렇게 잊어버리자. 

라고 생각한 순간.

"거기 소년들, 꼼짝마라!"
"뭐, 뭐야!"

이어폰 너머로도 들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 오후 햇살 속의 모든 시선이 향한 횡단보도 너머에는 비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안전장비를 꼼꼼하게 갖춘 라이더가 서있었다. 그 옆에 서있던 작은 소년이 라이더의 팔을 잡아당기자, 라이더는 알고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다시금 외쳤다.

"정의의 자전거를 타고, 무면허 라이더 지금 등장!"
"………."
"나이를 막론하고 이유없이 타인을 괴롭히는 것은 큰 잘못이다! 지금부터 그쪽으로 건너가겠다!"
"누, 누가 멍청하게 기다려줄 줄 아냐! 야, 가자!!"

주동자로 보이는 소년은 그런 말을 내뱉고는 횡단보도와는 반대되는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동안 신호가 바뀌기까지 기다리던 라이더는 자전거를 끌며 도로를 건넌 뒤 다시 자전거에 몸을 싣고 "거기 서라!"같은 말을 뱉으며 페달을 밟았고, 잠시 주변에서 웅성이던 사람들도 이내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는지 신호등을 따라 길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나는 거기에 오랫동안 서있었다.

=

히어로.
도시 곳곳에서 나타나 마을을 부수고 피해를 입히며 날뛰는 괴인들을 해치우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자들.

괴인.
특수한 요인으로 형성되어 인간에게 적의를 품고 날뛰는 생물의 총칭.

그런 것들이 존재하고,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알고있었다. 하지만 나는 주변에 무관심한데다가 대개의 경우 위험을 피해 서둘러 대피하는 입장이었기에 히어로라는 존재를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어쩌다 들려오는 S급이나 A급의 소문은 그것이 정말 같은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고도 강렬했고, 때문에 히어로란 결국 타고난 재능에 의해 결정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무면허 라이더라는 히어로는 그렇지 않았다.

S-A-B-C로 나누어지는 히어로 그룹 중에서도 최하위인 C그룹의 1위라는 것은 일반적인 영웅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B급에서도 뒤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뭔가 특수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력도 없다. 눈여겨볼 만한 재능이라고 한다면 자전거를 타는 기술 정도일까. 그런데도 그는 여느 히어로들보다 왕성하게 활동하며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전에는 몰랐지만 한번 존재를 깨달으니 얼마나 자주 눈에 띄이던지, 잘도 돕는구나 하는 마음 이전에 여태껏 대체 어떻게 그를 무시하며 살아올 수 있었는지 기가 막힐 정도였다.

어느 날에는 나무에 걸린 풍선을 대신 잡아주고 있었다. 
어느 오후에는 불량배에게 싸움을 걸고 있었다(쭉 지켜봤더니 엉망으로 얻어터지면서 계속 싸웠다). 
어느 날에는 길을 건너지 못하는 노파를 안내해주었다. 
우리가 피난해있는 사이 마을로 올라온 괴인과 싸우기 위해 전력질주했다.
어제 저녁에는 길 잃은 아이를 도와주었다,

나는 그저 지켜보았다.

나와 거의 같은 능력을 가진 일반인이 히어로라는 이름에 매여 이리저리 치이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나와 똑같은 처지이면서도 굳건히 달리며 히어로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모습을.

마음이 동하는 일도, 자랑스러움이나 어이없음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마치 허공에 존재하는 눈처럼 그의 활동을 지켜보다가 도로 일상으로 돌아갈 뿐.

이윽고 장마철이 되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가 시야를 부옇게 가렸다.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웅덩이를 지날 때마다 좌우로 세찬 물보라가 퍼져나갔다. 어머니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계속 집에 박혀있었을 눅눅한 날씨. 우산을 쓴 채 횡당보도의 신호등 불빛만을 멍하니 응시하던 나는 뒤에서 들리는 소음에 주머니 속 mp3의 전원을 껐다. 고막 가득히 차오르는 빗소리 사이로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야 방금 표정 봤냐?
-대박대박!!
-가방 돌려줘~ 돌려줘어~
-아 진짜 멍청하지않냐?

일부러 고개를 돌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예전 여기서 건널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핸드폰으로 장난을 치고 있던 세 소년의 기억이 방금 전 인화한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인간이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핸드폰에서 가방으로 표적이 바뀐 것은, 그 대상도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할까? …아니, 이런 생각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등 뒤에서 소년들은 끝없이 키득거리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양측 도로와 인도를 돌아보는 나를 발견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뭘 기대 하는 거냐?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심장이 싫은 느낌으로 두근거린다. 그 언젠가 화장실 안에 갇힌 채 바깥의 목소리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습한 공기. 퍼지는 담배 연기. 너무나 산뜻한 목소리. 오래된 나무 문의 다 떨어져가는 페인트. 거기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던 눈동자.

-뭘 엿듣고 지랄이냐?

숨을 들이킨다. 그때와 독같은 습기가 폐에 차는 감각은 역겨웠다. 괴롭힘. 왕따. 인간이란 그런 것에 의지해서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데에 즐거움을 느낀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소년들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를 짓밟으면 그만큼 자신은 높아진다. 그것만큼 유쾌하고 즐거운 일도 없다. 그걸 타인이 엿듣고 망치려고 한다면 똑같이 짓밟아주고 튀어버리면 된다. 어차피 어린데 좀 거친 짓 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게다가 모르는 사람인데.

그러니까?

뱃속이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사이 신호등이 바뀌었다. 우산을 쓴 소년들은 재빨리 길을 건너 골목길 한쪽에서 둥그렇게 둘러앉아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저 주인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멀리서 그들이 뺏은 자신의 물건이 이리저리 유린당하는 것을 보며 비명을 지르고 있을까. 누구든 좋으니까 제발 가방을 뺏어서 돌려달라고 비통하게 외치게 있을까. 분명 그렇겠지. 그렇지 않은 인간 따위 없다.

하지만 나는 소년들을 지나쳤다.
빗소리가 노이즈처럼 이어졌다.

우체국 여직원은 오후 4시 반부터는 금융 서비스가 불가능하다면서 난감하게 웃었다. 어떻게 안될까요. 죄송합니다. 규정이라서요. 무미건조한 대화는 나의 어색한 고갯짓으로 마무리되었다. 멀리서 다가온 도우미가 나의 설명을 듣고는 죄송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안다, 알고 있다. 그러니까 애매하게 웃는 건 좀 그만둬줬으면 한다. 대체 뭘 안다고 빙글빙글 웃어대는 거냐.

…그런 불평을 곱씹으며 우체국을 나선다. 빗줄기는 그치질 않는다. 들어간 지 몇 분도 안 지났으니까 당연하다. 우산에 부딪친 빗줄기가 투두둑 소리를 내며 보도블럭 위로 떨어진다. 귓가 너머에서 아이들이 키득거리는 환청이 들렸다. 착각이다. 귓가에서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환청이다. 누가 울던,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닌가. 내가 울었을 때도, 아무도 와주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있는 힘껏 이를 악물며 걸었다. 땅을 짓밟고, 빗물을 튕겨내며 걸었다. 더 빠르게 걸었다. 더 빨리 걸었다. 좀 더 서둘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달리고 있었다. 물먹은 운동화가 질척거렸다. 숨이 금새 차올랐다. 맞바람을 받은 우산이 덜컥거리며 진로를 방해했다. 어차피 낡은 우산이다. 아예 접어버리고 달렸다. 도로를 달리던 버스 한 대가 물웅덩이를 지나며 한바탕 물세례를 쏟아 부었다. 대충 손으로 얼굴을 털어내며 달렸다. 다행히 걸렛물을 뒤집어쓴 기억은 없다. 마실 뻔한 기억은 있지만. 시덥잖은 생각을 걷어차며 뛴다. 물웅덩이를 밟았다. 용케 미끄러지지 않고 멈춰 섰다. 빗줄기가 조금 굵어진 골목길에 소년들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본다. 없다. 문득 피로와 허무함이 치밀어올라 편의점 건물 앞 계단에 주저앉았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졌다. 그게 내 기력의 결정체인 것 같아 괜시리 손가락으로 뭉개버렸지만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편의점 간판 너머로 잿빛 하늘이 보였다. 

무기력한 하늘.
무기력한 나.
무기력한 시간.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있었다.
멀리서 자전거 벨소리가 들렸다.

"이봐, 괜찮은가?"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이에게 풍선을 돌려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목소리.
삥을 뜯던 불량배에게 싸움을 걸던 목소리.
늙은 노파를 부축해주며 안심시켜주던 목소리.
괴인을 향해 달려가며 기합을 외치던 목소리.
길잃은 아이의 기운을 북돋워주던 목소리.
그리고 이번에는 나인가.

손을 꿈틀거린다. 우산의 감촉은 없었다, 접어서 뛰어온다는게 접어서 내버린게 된건가.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오래되서 한 번 필 때마다 생고생을 시키던 고물이었으니까. 눈을 깜빡여 흐릿한 시야를 재정비하고 고개를 원위치로 돌린다. 아니나다를까 내 앞에는 무면허 라이더가 서있었다. 이런 날에도 풀 보호장비인가. 안쪽까지 습기가 찰 것 같다.

"어딘가 다친건가? 말할 수 있겠어? 안심해라, 나는 히어로다!"

좀 오랫동안 침묵했다고 난리도 아니다. 그것이 도리어 몸에 기운을 돌게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져있던 몸을 추스리고, 나는 그 어느 질문에도 부합되지 않는 인삿말을 던졌다.

"그 아이는 가방을 돌려받았나요?"

그는 조금 어리둥절해하다가(고글 때문에 눈매가 잘 안보이긴 했지만 그랬을 것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럼 됐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침묵했다. 또 다른 위기에 처한 사람을 위해 바람처럼 사라질 줄 알았던 무면허 라이더는 여전히 내 앞에 서있었다. 조금은 의외였다. 이제 됐다는 말을 들었더라도 비에 젖은 채 자포자기한 듯 퍼져있는 사람을 그냥 두고볼 수는 없다는 걸까. 참 대단한 오지랖이다.

나는 단 한번도.

"……,"

버스와, 자동차와, 이따금 오토바이.
무언가를 말할 기분이 든 것은 색색의 우산을 쓴 꼬맹이 두 명이 길을 건너간 다음이었다.

"무면허 라이더씨."

빗소리.

"저는 히어로가 될 수 있을까요?"
"나 또한 히어로다."

그렇지.
그런거겠지.

나는 몸을 웅크리고 울었다.

=

사람은 무력하다. 그리고 무관심하다.

이것은 내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다. 동시에 기만이다. 내가 무력하다고 생각한 건 사실 나 자신이었다. 내가 다른 누구보다 무관심하다고 생각한 것 또한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고, 이것이 당연한 세상의 흐름이라고 되뇌이며 끊임없이 자기를 합리화했다. 그것은 무척이나 펀안한 지옥이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불구덩이였다. 사실은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고, 지켜주길 바랬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 처럼 곧은 심지를 가지고 나를 구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뭐랄까, 이것 저것 늘어놓으면서 지옥의 그늘에 숨어있더라도.

결국 (정말이지) 마지막에는 자신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법이다.

"우리 아빠가 어렵사리 사준 게임기를 뺏아가버렸어…. 부탁이야 누나! 되찾아줘!!"
"알고있어. 그걸 위한 히어로야."

울먹이는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심호흡을 하며 길을 건넌다. 건너편에서는 세 명의 소년이 게임기를 들고 키득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열중했던지 내가 바로 눈 앞까지 다가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몰두하고 있던 소년들은 갑작스레 눈 앞을 가리는 나의 손에 짜증섞인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아, 뭐야!"

잘 물어주었다.

"히어로 이바라키. 여기에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