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평온을 가져다준다』
그 명제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 누구라도 한번 호흡이 멈추면 그것으로 끝. 이따금 뼈에 맺힌 원한이라느니 죽어서도 저주해주겠다느니 하는 말을 남기고 굉장한 얼굴이 되어 숨을 거둔 자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죽음이 가져다주는 평온을 스스로 거부한 결과일 뿐이다. 말하자면 존중은 해줄 지 언정 동정이나 연민은 필요 없는 자유 의지이자 자업자득. 따라서 한 평생 보고 들은 원망과 저주가 대부분 자신을 향한 것이라 해도, 그는 언젠가 누군가의 검 끝에서 자신의 평온한 죽음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의심치 않았었지만.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소년은 참으로 깔끔하게 선언했다. 추락과 부유, 압박과 융해의 미로에서 눈을 뜬 직후였다고는 하나 수천의 전장을 넘어서며 생명을 빼앗아온 그룬왈드가 일순 멍해졌을 정도였다. 구석구석에 빼곡하게 드리워진 어둠의 베일 사이로 보이는 촛불이 그의 마음을 반영하듯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기괴한 일렁임을 토해냈다.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 당신은 현세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것도 보통 죽음이 아니라 미련 어린 죽음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음은 평온을 가져다준다』 설령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태의 죽음이었더라도, 죽음의 인과를 피할 수 없었다는 시점에서 미련은 급속히 가치를 잃는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그룬왈드라는 인간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을 터다. 그런 자신이 죽어가면서 미련을 남겼다니…까지 생각하던 그룬왈드는 불현듯 자기의 죽음을 이미 완료된 형태로 다루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고 미간을 찡그렸다. 소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안심하세요. 이 그림자 세계에서 성녀님의 힘으로 다시 살아난 이상, 당신이 또 다시 죽음을 맞이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잊으셔선 안됩니다. 미련이 남아있었다고는 해도 당신이 이곳에서 부활할 수 있었던 건 성녀님의 따님이 당신을 골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성녀의 딸?”
“네, 그 분이야말로 성녀님의 의지를 이을 '그릇'이자 당신을 이끌 '인도자'이십니다.”
촛불이 춤춘다. 동시에 그의 정면에서 작은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갈색머리에 녹색의 눈동자, 나이 어린 소년보다도 더 어려보이는 체구에 하얀 블라우스와 붉은 치마 아래로 보이는 다리에는 꼭두각시 인형에서나 볼 수 있을 적나라한 관절자국. 인간이 아니군. 그룬왈드의 냉정한 판단과 동시에 인형이 예의바르게 허리를 숙이며 무언의 인사를 건넸다. 치마를 양 손으로 가볍게 집어드는 그 동작은 실로 자연스러워 일말의 어색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과 동시에 모든 빛이 사라졌다.
=
-혼란스러울 거라는건 알아. 이 세계는 낯설테고, 나는 당신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이 나와 함께 해준다면 나는 생전의 기억을 되찾아 줄 수 있어. 당신이 남긴 미련이 무엇이었는지도.-
귀를 통해서, 라기보다 머릿 속에서 직접적으로 울려퍼지는 목소리.
“거절한다면?”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 아까도 들었겠지만 나는 당신을 저승에서 이승으로 이끄는 안내인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걸. 내가 없으면 당신은 하염없이 이 세계를 헤메이는 망령이 될 뿐이야. 나도 의미없는 껍데기가 되겠지-
암흑과 소년이 함께 자취를 감추고 그와 인형만이 어딘가의 고성 한 켠에 남겨져있는 상황에서 서늘한 빛을 품은 칼날이 시야를 찌르고 있는데도, 인형은 별달리 당황한 기색없이 말을 끝맺었다. 남은 것은 그가 무엇을 선택하든 자유니 어떻게 해도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면 여기서 검을 휘둘러도 상관없다는 듯한 초록빛 눈동자였다.
만약 그 상황에서 인형이 떼를 쓰거나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면 정말로 베어넘기지는 않았더라도 그대로 내버려두고 떠나는 정도의 짓은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형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침묵의 강이 흐르는 동안 어느 정도 마음의 가닥을 잡을 수 있었던 그룬왈드는 조용히 검을 거두었다. 검집과 검이 서로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인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감사받을 정도의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뭘 하면 되는거지?”
인형은 대답 대신 총총이는 걸음걸이로 그를 지나쳤고, 그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돌린 그룬왈드는 자신의 등 뒤에 나있는 하나의 창문을 발견하고 인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치형으로 쌓아올려진 창문 너머에는 묘하게 채도가 낮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보여? 저 세계를 계속 나아가면 언젠가 이승에 다다를 수 있어.-
“그냥 나아가기만 해서야 굳이 나를 되살린 의미가 없겠지. 적이 있는건가?”
-맞아. 마수라던가, 다른 이들의 기억이라던가.-
“다른 이들?”
-사람은 누구든지 죽는 법이니까. 어머니는 그 중에서도 특별한 전사만을 골라 이 세계에서 부활시키셨어. 하지만 부활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기억은 여기저기 흩어져버렸고, 그대로 실체를 가지게 되어버렸지. …개중에는 당신 자신의 기억도 있을거야.-
“…내가, 또 다른 나와 검을 겨룰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가?”
-맞아. 여기보다 좀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일단은 이 주변에서 당신의 실력을 되살릴 필요가 있어.
그렇게 말을 끝맺은 인형은 발돋움용으로 사용한 소파에 기대앉은 자세 그대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보면 아직 내 이름도 말하지 않았네. 나는 베르크라이엔. 베르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그룬왈드다. 좋을대로 부르도록.”
-그럼 룬이라고 불러도 돼?-
“…….”
-농담이야.-
정말로 농담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룬왈드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며 베르를 내려다보았다.
무기질적인 옆얼굴이 묘하게 즐거워보이는 것은 눈의 착각일까.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해.-
관절투성이 손이 악수를 청한다. 손가락 만으로도 충분히 감싸쥘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그것을 마주잡자 마치 도자기를 만지는 듯한 촉감이 전해져, 그룬왈드는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손끝에서는 체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래?-
“아….”
-뭔가 문제가 있다면 지금 말해줘. 곧바로 퀘스트를 하러 나갈 생각이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그 이상의 추궁은 없었다. 그룬왈드는 소파에서 내려오려하는 베르를 한쪽 팔로 부축해준 뒤 다시 한 번 구름 낀 풍경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가 생전 보아왔던 그 어떤 풍경과도 부합되지 않는 세계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이곳에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미련에 의한 싸움을 계속해나가게 된다. 언젠가 이승으로 다시 발을 내디딜 때까지, 그리고 소녀가 성녀의 영역에 이를 때까지.
그것은, 분명 무척이나 길고 긴 여정이리라.
“…죽음은 끝이 아니란 말인가….”
죽음 이후에는 평온만이 찾아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했던 ‘죽음’에는 또 다른 갈림길이 있었고, 자신은 보기 좋게 그 갈림길에 들어서버리고 말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의심하거나 농락당했다고 분노해야하는 상황일런지도 모르겠지만, 의외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나름대로의 평온…일런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등 뒤에서 촛불이 한번 일렁, 였다.
=
"…이렇게 또 하나의 따님이 여행을 시작하셨습니다."
"부디, 성녀님을 부활시킬 수 있을 정도의 그릇이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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