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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기타

[이영싫/백모래나가]만약에 나가가 진眞나이프였다면

 

"나가, 붕대 매줘."

백모래가 그 말을 꺼냈을 때 나가는 이제 슬슬 집에 갈 무렵임을 알았다. 몸으로 느껴지던 체감시간은 아직 학교에서 돌아온지 삼십 분도 안 지났을 거라고 항의하고 있었지만 백모래의 고양이들과 뒤엉켜 놀고 있노라면 매번 이렇게 시간관념이 모호해지게 마련이었고, 뭣보다 백모래가 저런 부탁을 하는 것은 하루에 딱 한번 뿐이었다. 전날에도 그랬고, 전전날에도 그랬듯이. 이따금 나가가 일이 생겨 백모래를 만나러 오지 못했을 경우 그 다음날에 이틀 묵은 붕대에서 먼지냄새가 난다고 타박하며 오자마자 한번, 가기 전에 한번씩 갈게 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정말로 드문 경우였다. 

 

진찌 나이프의 일원인 나가는 정말 성실하게 아지트를 찾아왔으니까.

 

"알겠습니다."

자신의 볼을 열심히 핥아주는 고양이에게 아쉬운 이별을 고한 뒤, 나가는 비스듬히 누워있던 자세에서 몸을 일으켰다. 백모래의 한 손에는 그의 색깔만큼이나 새하얀 붕대가 슬쩍 혀를 빼물고 있었다. 그것을 받아든 나가가 백모래의 뒤로 돌아가자 그의 등 뒤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고양이들이 나지막하게 울며 슬그머니 자리를 비켰다. 나가가 나이프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성립된 암묵의 룰이 어느샌가 말 못하는 고양이들에게도 적용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고양이 꼬리가 무릎 아래에서 짓눌리는 사태를 피한 나가가 자신이 어제 감아주었던 붕대를 풀어내는 동안, 손가락으로 장난스레 그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던 백모래가 속삭였다.

 

"나가는 예쁘기도 하지-."


조금 전까지 고양이들과 어우러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높낮이였다. (착하다, 우리 아기, 어쩜 예쁘기도 하지.) 나가는 고양이의 까끌한 혓바닥으로 손가락이 핥아질 때와 비슷한 감각이 번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최대한 담담하게 어제 자신이 감은 붕대를 풀어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난스레 웃고있던 백모래는 갑작스레 한 손으로 나가의 왼손목을 붙잡아 자신의 눈가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나가의 손등을 간지럽혔다.

"손목도 한 손에 잡히고."

"……."

"메두사보다 가늘지 않아?"
"그럴 리 없죠."

 

나가는 상사의 터무니없는 착각에 일침을 가하며 왼손을 뿌리친 뒤 새로운 붕대의 적절한 길이를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바로 조금 전에 풀어낸 붕대는 때마침 그곳에 있던 고양이를 위한 깜짝 선물이 되어있었다. 가르랑거리는 울음소리와 함께 팔다리를 꼬물거리며 붕대를 가지고 노는 그 모습에 잠시 눈길을 빼앗겨 붕대를 끊어야 할 손을 멈추고있던 나가는 자신을 향하는 백모래의 목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렸다.


"나가는 내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별로 보고싶진 않은데요."
"으앙, 상처받았어."
"새삼스레 뭘…."

엷은 한숨을 내쉬며 붕대를 매는 손을 바삐 놀리던 나가의 손가락에 갑작스런 통증이 찾아온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

나가는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상사의 손에 붙잡힌 손목은 좀 전과 같이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백모래의 이빨에 손가락을 내주고있었다. 날카롭다기에는 너무 지나치고, 그렇다고 둔중하다고 표현하기엔 무언가 부족한 통증이 심장박동에 맞춰 욱씬거리는 가운데, 나가는 아무 말 없이 그 고통을 묵인했다. 단단한 이빨이 피부에서 떨어져져나가고 부드러운 혓바닥이 손끝을 핥아내렸을 무렵 손가락에 매달려있던 통각은 아픔도 무엇도 아닌 기묘한 감각으로 바뀌어있었다. 

"상사를 무안하게 만든 벌이야."
"…삐졌다고 깨무는건 어린 애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요?"

일렁이는 마음을 추스리며 그렇게 얼버무린 나가는 붕대의 매듭을 짓고는 흘깃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상처 하나 없이 타액에 젖어있는 손끝은 여전히 두근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나저나 나가."
"아, 네?"

백모래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가의 대답과 동시에 사람 하나 분의 무게가 나가의 허리를 껴안고 그대로 침대로 쓰러졌다. 주인의 폭거에 놀란 고양이들이 불만 섞인 울음소리를 높이고, 도수 없는 안경이 주인의 귓가에서 튕겨올라 주름진 시트 사이로 몸을 숨겼다. 시야와 균형감각의 혼란이 서로 뒤엉킨 나가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박이는 동안 백모래의 목소리가 슬그머니 나가의 몸을 타고 기어올라왔다.

"내일 데이트하자."
"안돼요."
"왜?"

나가는 시트를 더듬어 자신의 안경을 찾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일 오후에 체육관 청소하고 봉사시간 채워야 해서."
"?! 나가 넌 내가 중요해 아님 봉사시간이 중요해!"
"…봉사시간?"

공공기관이 아니라 제대로 된 봉사시간을 줄 수 없는 진 나이프의 단점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허리춤을 껴안고있던 백모래의 팔이 느슨해진 틈을 타 재빨리 몸을 빼낸 나가는 백모래에게 꾸벅 얼굴을 숙여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붕대로 눈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실연당한 여중생같은 표정을 짓고있던 상사(현재 악의 조직 나이프의 보스)의 모습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아까부터 계속 열이 몰리는 자신의 얼굴을 아무도 모르게 가라앉히는 것이 더 급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 날 체육관을 죄다 정화시켜버리고는 자신을 기다리는 백모래를 발견한 나가는 순간적으로 그의 사지를 각각 오대양으로 텔레포트시켜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하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