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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기타

[이영싫/진나이프나가]그런 영웅은 싫겠지

-부제 : 만약에 나가가 진眞나이프였다면. 입단편.

-이것과 그것의 차이가 제법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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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이 차랑 부딪쳐서 접촉사고가 났는데, 이 운전자들이 서로 실랑이질을 벌이다가 어느 한 쪽이 지나치게 열을 받은 모양입니다.)

 

  머리 위에는 회색 태양, 옅은 붉은 색으로 펼쳐진 하늘. 누렇게 빛이 바랜 건물들이 옹기종기 늘어선 길은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아직도 같은 곳을 뱅뱅 돌고있는 듯한 착각을 밧줄 삼아 숨통을 조여왔다. 뫼비우스의 띠 마냥 자신의 발소리와 숨소리만을 되새김질 할 뿐 조금도 변하지 않는 이 공간의 어딘가에서 그 일이 또 다시 반복되고, 그래서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치명적인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있는 나가에게는 미칠 일이었다.

 

 (한번 더 박아줄까, 라면서 반 협박으로 자기 차에 도로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는데, 하필 그 순간 급발진이 일어나버려서 말이죠.)

 

그 비극을 막고싶어서, 어떻게든 부정하고 지워없애버리고 싶어서 이토록 필사적으로 뛰고있는데도 결코 '그 이전의 순간'에는 닿지 못한다. 아주 약간, 정말로 약간만 더 빨리 도착한다면 막을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그 이전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잔혹한 프로세스. 그래서 나가는 이렇게 늦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저도 모르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징조'를 기다렸고, 그런 식으로 피할 수 없는 종말을 향해 감각을 곤두세우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소년은 스스로를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그런 감정들이 쌓이고 반복되어 뒤섞인 끝에 포화상태에 이르면, 갑자기 오싹한 한기가 등골을 찌르는 것이다.

 

……………!!!!!……………

 

불현듯 귀를 찢어내는 무음과 함께 -정말로, 그것은 무음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고음이었다- 빛바랜 거리에 선명한 원색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까만 도로, 샛노란 스키드 자국. 파란 트럭의 타이어 자국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분탕질을 치는 것 마냥 찐득하게 흩뿌려진 연두색. 결국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한 발 늦게' 도달한 나가는 온몸에서 솟아흐르던 땀이 단숨에 식는 것도 모른 채 호흡을 멈췄다. 허파가 굳어지고, 머릿 속이 말라가고, 의식이 쩍쩍 부서져가는 가운데 안구만이 생기있게 꿈틀거리는 기묘한 감각. 아아, 사람이란 아무리 기절하고 싶어도 이토록 시야가 뚜렷하면 무의식의 축복을 받을 수 조차도 없는 것이다.

 

눈 앞에 가장 이해하기 쉽기에 더 이상 이해하고 싶지 않은 참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운전자가 나가떨어진 사이 그 자동차가 트럭이고 뭐고 다 밀어내고 건너편 인도로 돌진했는데 그만 어머님이…)

 

"…엄마……."

 

처참히 뭉개졌어도 누구보다도 명확히 정체를 알 수 있다는 모순을 안은 채, 나가는 이쪽으로 서서히 번져오는 연두색 웅덩이를 짓밟으며 느릿느릿 걸어나갔다. 그만큼이나 봤으니 이제는 침착하게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아무리 속으로 되뇌어봤자 무슨 소용인가, 결국에는 이 꼴인데. 이성은 휘발되고 사고력도 가뭄때의 논바닥처럼 말라붙어 쩍쩍 갈라져 있을 뿐인 머리와 온몸에 녹이라도 슨 것 마냥 삐걱거리는 사지.

 

본능적으로 투시로 들여다보면 절망을 뭉쳤다 마구 잡아뜯어놓은 모습을 한 상처가 멍하니 굳어진 이쪽을 비웃고, 염력으로 연둣빛 액체를 끊임없이 토해내는 상처를 누르면 잠깐 멈추는 듯 하다가도 다른 부분에서 봇물처럼 터져나온 연두색이 전력으로 시각을 유린한다. 그걸 보고있노라면 후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탓인지 상당히 예민해져있는 눈이 저절로 시큰거렸지만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헛된 노력을 하다보면 서서히 시야를 제외한 모든 것이 갉아먹혀 모든 기력을 잃고 연두색 어둠 속에 쓰러진다. 

 

그러다 퍼뜩 눈을 뜨면 또 다시 빛바랜 거리의 한복판에 서있는 것이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피하시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큰 고통은 느끼지 않고 가셨으리란 점이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끝나지 않는다. 끝낼 수도 없다. 언제나 똑같은 타이밍에 도착해서 절절한 무력감을 맛보면서도 이번 한번만은 무언가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고, 결국 또 뒤늦게 도착해서 어쩔 도리 없이 무력한 발버둥만 치다 리셋당한다. 이런 짓을 몇 번째 반복해왔는지도 이제는 기억나지 않고, 자신이 왜 이래야 하는지,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이 공간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전부 포기했다. 그저 달리고 좌절하며 감정을 추스릴 새도 없이 다시 달리고, 목격한 참상에 흐느낄 틈도 없이 또 쫓아가고.

 

아지랑이 마냥 현실감없이 일렁이며 끝없이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

그것이 앞으로도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어깨를 짓누르는 죄책감만큼이나 굳건했다.

 

"안녕, 나가."

 

어느 순간 눈 앞에 나타난 하얀 그림자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그러했을 것이다.

 

=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사고였습니다. 자신을 너무 책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책망하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나가는 그녀를 구할 수 있었으니까.

 

염력으로 튕겨오는 차를 막아낸다던가, 엄마의 주변에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만들어낸다던가, 정 안되면 엄마만이라도 순간이동시켜 안전한 곳으로 보낼 수도 있었다. 단 몇 분, 아니 몇 걸음 만이라도 서둘렀더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을 참사. 그러나 나가는 그 몇 걸음을 지체하는 바람에 눈 앞에서 엄마가 죽는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 사고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터에서 영웅과 악당이 싸운다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들려서 잠깐 구경이나 하고갈까 생각했다가 예상 외로 개성이 넘치는 그 분장에 도리어 발목이 묶인게 화근이었다.

 

어느 쪽의 잘못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걸 따져봤자 의미도 없으리라.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은 한 웅큼도 기억나지 않고, 당연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응급지식들은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 순간까지 유용하다고 생각했던 초능력조차 엄마의 목숨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염력, 세세한 조정을 하지 않으면 더한 압박을 주는 꼴인데 심한 충격에 빠져있었으니 제대로 쓸 수 있었을 리 없다. 단지 떨리는 손으로 교복을 벗어 막무가내로 피가 흐르는 부분을 꽉 눌렀을 뿐이다. 투시, 끔찍할 정도로 적나라한 상처를 그대로 보여줄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가는 이빨을 악다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며 눈물을 떨궈내야했다. 텔레포트, 지금이 아니라 과거에 썼어야 했던 것. 염력으로 자동차를 밀어내며 어머니의 몸을 빼내 어디로든 이동하려고 했던 나가의 몸에 왈칵 쏟아진 피는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이 무사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가가 피투성이가 되어가면서 필사적으로 어머니를 구하려 하는 동안 사고현장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역으로 생각해본다면 그 비참한 참상에 아무도 선뜻 다가올 용기를 내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 나가 또한 당사자가 아니었더라면 잔인한 장면을 보기 싫어서 일부러 길을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도와줬으면 해서 고개를 돌렸던 순간 사람들의 눈동자와 안경 사이에서 빛나던 그 렌즈는 무어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다양한 기종의 핸드폰과 카메라등이 무기질적인 렌즈를 빛내며 이쪽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을 발견한 순간, 나가는 생각했다.

 

(영웅은 어디에 있는거지?)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너무 심각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런 우스꽝스런 생각밖에 할 수 없었던 걸까? 주변을 빽빽하게 둘러싼 사람들을 해치고 조금 전에 잠깐이나마 구경했던 영웅의 실루엣이 튀어나오는 듯한 환각이 일렁였다가 사라지고, 그때까지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호기심 섞인 술렁거림이 귓가에 똑똑히 울려퍼졌다. -누가 차에 치었다면서? 진짜야? 죽었어? 아직 안 죽은거 아냐? 구급차는 불렀어? 완전 끔찍하다, 누가 도와주지 그래? 그럼 네가 가지 그래- 대부분 갑작스런 참상에 숨을 삼키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다른 한켠에서는 영화촬영이냐며 질문하는 걸로도 모자라 촬영 앵글이 잘 나오지 않는다며 몸을 뒤로 빼는 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뒤이어 거기가 아닌 어딘가에서 최대한 소리를 죽인 "자, 웃어요~" 소리와 함께 플래쉬가 번쩍인 순간, 나가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영웅 따윈 없어.)

 

정답을 알리는 차임 대신에 구급차 소리가 길게 꼬리를 끌었다.

 

=

 

그 이후로는 툭하면 병실에서 눈을 떴다.

 

엄마의 용태가 심각해서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거기에서 먹고자며 간호를 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라는 전개였으면 참 좋았겠지만, 그 주체는 언제나 나가 자신이었다. 처음에는 엄마의 죽음을 선고받은 그 자리에서 흐느껴 울다가 혼절했고, 두번째에는 며칠씩이나 식음을 전폐하는 바람에 의식을 잃어 억지로 끌려왔다. 스스로 손목을 난도질했던 세번째에 이르러선 이제 간호사나 의사뿐만 아니라 왠만한 장기 입원환자들까지 나가를 알게 될 지경이었으니 만약 이대로 네번째 입원을 갱신한다면 병원에서 VIP취급을 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도 나가가 네번째까지 살아있을 때의 얘기겠지만."

 

침대에 누운 채 고개를 돌리고 있으면 하얀 남자가 창문가에 기대어 앉은 모습이 비스듬하게 보였다. 나가는 링거액이 흘러들고있는 손목이 반대편이라서 다행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며 나른함을 윤활유 삼아 부드럽고 무겁게 움직이는 눈꺼풀을 두번 깜박였다. 방금 전 물을 마셨는데도 살짝 말라있는 입 안에는 병원 특유의 냄새가 잔뜩 스며들어 있었다.

 

"…그런데… 며칠이나…지났죠…?"

 

목소리라기보다 한숨, 혹은 조금 큰 숨소리에 불과한 울림에 남자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는 삼사일 정도, 라고 대답했다.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그동안 꿈 속을 미친듯이 헤메이길 반복한 나가가 그 의미를 이해하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전례가 있었기에 갈피를 잡는데도 시간이 덜 걸린 셈이다. 맨처음 병원에서 기절하고 깨어났을 때의 나가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누구고 왜 여기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그만큼 꿈은 길었다. 매번 의식의 흐름과 시간의 흐름이 어긋나서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로.

 

"뭐, 일단은 천천히 쉬어."

 

홀연히 뻗어온 손이 나가의 머리를 어루만진다. 문득 나가는 이 사람의 정체가 무얼까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얀 옷을 입고있으니 의사라고 보는게 보통이겠지만, 나가가 기억하기로 이 병원에 눈에 붕대를 감고 돌아다니는 의사는 없었다. 그럼 환자일까 생각해봤지만, 눈을 가린 채 자연스레 움직인다는 시점에서 이미 환자라고 볼 수 없다. 게다가 생전 처음보는 이 남자가 예전부터 나가를 알고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수상함이 차고 넘쳐 흐르는데도, 정작 나가의 마음에는 가벼운 의문만이 날개짓 할 뿐 한 점의 파문도 일지 않았다. 아마, 그만큼 메말라버렸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어진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은 파문이 일지 않았다기보다 입이 떼어지지 않은 탓이었다.

 

"나가는 어머니의 죽음이 누구 탓이라고 생각해?"

 

그런 것을, 말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도 나가의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싸움을 적당히 정리하지 않은 운전사, 급발진을 일으킨 운전사, 흥미 위주로 주변을 둘러싸고만 있던 구경꾼들, 늦게 온 구급차…. 그런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걸까? 하지만 법적으로 따지면 거기엔 그 누구의 책임도 남지 않아. 그냥 '불행한 사고'라느니 '모두가 피해자'라는 그럴듯한 말만 남아있을 뿐이지. 그럼 억울하게 죽어버린 사람의 유족들만 한바탕 울어제낀 뒤 보험금을 배분받으면 전부 끝나는거야. 그런 사회라고."

 

그냥 그렇게, 유야무야.

불행만을 남기고 흩어진다.

 

"그런걸 받아들일 수 있어?"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것이 너무나 절망스럽고 미워서, 나가는 몇번이고 스스로를 내버렸다. 내버릴 때마다 죄책감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꿈 속에서 절망을 쫓는 일을 한없이 반복한 끝에 마음이 전부 너덜너덜하게 닳아버릴 정도로.

 

"하지만 그것보다 더 웃긴건 말야, 나가."

 

어느새 침대로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간병인용 의자에 걸터앉은 채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주제에 자기들이 영웅이라고 하는 녀석들이 있다는 거야."

 

순간 손끝이 떨렸다. 어린아이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코스프레로 서로 대치하고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둘로 나누어져 서로를 겨누는 목소리는 분명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대결구도였지만, 어딘지 모를 부분에서 약간 나사가 빠져있었다. 그것이 영웅과 악당의 대결이라며 수군거리던 군중의 목소리는 어느새 엄마의 죽음을 구경하는 목소리로 뒤바뀌고, 뒤이어 눈 앞에서 생기를 잃어가던 엄마의 모습도 신기루처럼 피어올랐다. 오직 영웅과 악당만이 그 풍경에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없었으니까.

 

"나가, 받아들일 수 있어? 정말로 영웅이 필요한 시점에는 아예 얼굴도 보이지 않았던 녀석들이 영웅이랍시고 떠들며 돌아다녀. 그런 녀석들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자기들은 악당이라고 말하는 놈들도 있지. 자기만족에도 정도란게 있는데 말야. 악당다운 짓거리도 하지 않는 주제에 그저 뜨뜻미지근하게 굴면서…."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았을 위가 시큰거렸다.

내쉬는 숨결은 스스로 듣기에도 명백히 떨리고 있었다.

 

"인정 못하겠지?"

 

(영웅 따윈 없어.)

 

아무도 돕지 않는 그 원형 속에서 처절하게 깨달았다.

그런데도 그런 이들이 영웅이라는 이름을 대고 있다면….

 

"…그런, 영웅은… 싫어요."

 

한번 내뱉은 말은 자신의 귀를 통해 재구성되어 마음의 형태를 이룬다. 고요하던 마음의 표면에 살얼음이 끼고,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아지랑이같은 것이 일렁이는 감각. 나가는 그것이 점점 확대되어 바짝 마른 입 안을 스치는 한숨에까지 전염되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엄마가 죽은 이후로 마음 속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있던 무형의 무언가가 생명을 얻은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하나.

 

"그럼, 나와 함께 하지 않을래?"

 

나가는 눈을 깜박였다. 아까보다도 훨씬 명료한 움직임이었다.

 

"영웅이라느니 어쩌니 하면서도 결국 겉치레와 형식뿐인 녀석들에게 진정한 어둠이라는걸 보여주자. 내가 허락해줄게. 뭐든지 저질러버려. 네가 엄마를 잃어버렸을 때 느꼈던 그 고통과 슬픔, 모든 절망들을 똑같이 녀석들의 면전에 던져주고 스스로 영웅이라는 이름을 대는게 얼마나 멍청하고 주제넘은 짓인지 알려주는거야, 어때?"

 

형태를 얻은 그림자는 더 할 나위 없는 방향성까지 손에 넣었다.

나가가 그 손을 잡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 전에 하나.

 

"…당신은… 누구죠?"

"아, 그러고보니 자기소개를 잊어버렸네."

 

조금 전의 날카로운 대사가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인 뒤, 하얀 남자는 입을 열었다.

 

"나는 백모래. 나이프Knife의 보스야. …앞으로 잘 부탁해. 나가."

 

나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앞으로 살아갈 방향이 결정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