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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고스트 메신저

[투림]이게 무슨 순정만화도 아니고

“쟤야, 창가에 앉은 남자애.”

“엄마가 무당인데 귀신한테 잡혀갔다지?”

“맞아맞아, 그래서 할아버지랑 같이 살았는데 글쎄 할아버지도 죽었데!”

“괜히 말걸지 마, 잡귀 붙을라!”

 

 

엄마가 어쨌다느니 할아버지가 저쨌다느니,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지네들 마음대로 떠드는건 둘째치더라도 기말고사가 끝날 때까지 한 교실에서 지낸 아이들이 뱉을 말은 아니다. 어디 다른 반에서 뒤늦은 구경꾼이라도 온 건가. 아이들의 음침한 예상과 달리비행기 구름이 흩어지는 모양새를 쫓고 있던 강림이 고개를 돌리자 과연 한 무리의 아이들 사이에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아이가 보였다. 안그래도 기가 세보이는 인상인데, 강림의 시선에 지레 겁을 먹고 몸을 움츠리는 주변 여자아이들을 버려두고 성큼성큼 남의 반으로 들어오는 걸 보아하니 보통 베짱이 아니다. 강림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로 앞까지 다가온 소녀가 물었다.

 

 

“네가 강림이지?”

“어.”

“구룡포가 니네 가게라며?”

 

 

이것 봐라? 강림이 슬쩍 눈썹을 올리자 소녀가 제 품에서 편지봉투를 꺼내들었다. 새하얀 외견과 달리 봉투 입구는 알록달록한 무늬 테이프로 봉해진 상태였다. 여기에 귀신이 붙어있을 리는 없다. 편지를 보다가 다시 시선을 올리는 강림 앞에서 이름 모를 소녀가 팔짱을 꼈다.

 

 

“그거, 니네 가게 알바한테 좀 전해줘.”

“우린 알바 안써.”

“발뺌하지마. 너랑 그 오빠랑 얘기하는 거 다 봤어. 둘이 꽤 친해보이던데?”

 

 

오빠?

 

 

“설마 그 바보… 아저씨를 말하는 거야?”

“잘 아네. 그 오빠, 좀 내 타입이더라. 니가 중간에서 다리 좀 놔줘.”

“관심있는건 넌데 왜 애먼 사람을 걸고 넘어져?”

“좋은게 좋은 거라잖아? 부탁해.”

 

 

한 손가락으로 편지봉투를 짚어 쓱 내미는 동작에서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지만 이미 산전수전 넘어온 강림에겐 별다른 효과가 없다. 소녀가 편지에서 손을 떼기가 무섭게 강림이 들고있던 샤프로 편지를 튕겨내자 힘에 밀려 훌쩍 책상 너머로 넘어간 편지가 나무 바닥 위를 뒹군다. 떨어진 편지를 주울 생각도 않고 아무 말 없이 강림을 쳐다보던 소녀는 잠시 숨을 몰아쉬나 싶더니 다음 순간 돌연 강림의 뺨을 매섭게 후려쳤다. 편지가 추락했을 때부터 술렁이고 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숨을 죽였다.

 

 

“유령질로 돈버는게 불쌍해서 좀 어울려주려고 했더니, 어디서 기어올라?”

 

 

한 번으로 모자라 두 번이나 뺨을 때린 소녀가 가볍게 손을 턴다. 반 아이들은 이제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소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강림은 홧홧한 뺨을 감싸지도 않고 이맛살만 찌푸린 채 소녀를 응시했다. 강림을 때릴 때의 단호한 동작과 달리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조심스레 집어올린 소녀가 그 시선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저주라도 걸게? 소용없어. 난 그딴 거 안 믿거든.”

“저주는 무슨. 하필 유령에게 반한 게 불쌍해서 그런다.”

 

 

호들갑스러운 여자 아이가 비명을 삼킨다. 하지만 상대방은 역시나 강적이었다.

 

 

“병신. 그림자 있는 거 다 봤거든? 쪽팔려서 구라치는 거면 좀 제대로 하던가.”

 

 

구라는 무슨. 뭐라 대꾸할 사이도 없이 몸을 돌려 반을 나가버린 소녀의 등 뒤를 응시하던 강림은 반 아이들 모두가 쑥덕이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특히 여자아이들의 눈이 적대적이었다- 혀를 차며 책상위에 푹 엎드렸다. 쩌릿한 뺨은 아프지는 않았지만 쓸데없는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성가셨다.

 

 

=

 

 

“너 아침밥 안 먹고 갔더라.”

 

 

아무도 오지 않을 골동품점의 먼지를 떨어대다가 나와서 하는 말이 저런 가정적인 대사라니. 강림은 어깨에 먼지떨이를 척 하니 걸치고 사뭇 당당하게까지 보이는 자세로 서있는 강림도령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다 자전거의 잠금잠치를 마저 걸었다.

 

 

“그게 왜.”

“왜는 무슨. 어린게 벌써부터 밥 굶어버릇하면 못 쓴다.”

“나 안 어리거든? 중학생이거든?”

“초딩이나 중딩이나 똑같거든? 어른 말하는데 따박대지 말고 얌전히 끼니 챙겨먹어라, 어? 정 입맛이 없으면 국에 밥이라도 말아 먹던가!”

“아 가족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아! 아저씨 일 안해?!”

“이게 걱정되서 하는 말에 대고 뭐 이렇게 말대꾸질이야?”

“시끄러! 꺼져!”

 

 

내지르고 계단을 올라가는 뒤쪽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기색은 없다. 혀차는 소리와 함께 '저녁은 챙겨먹어라!'하는 말이 끈질기게 따라붙었을 뿐이다. 하여간 아주 끝까지 가족행세다. 이러니까 쓸데없이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 괜한 오해를 받는 거지. 저승사자가 맘에 들었으니 다리 좀 놔달라니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냐고.

 

 

“쯧.”

 

 

괜시리 뺨이 따끔거린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의뢰비로 돈을 받은 다음에 선심 쓰듯 전달해줬어도 괜찮았을텐데. 답답한 마음에 침대에 풀썩 드러누워있던 강림은 가게 아랫쪽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뜨악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인데도 어디서가 들은 것처럼 낯설지가 않다. 근데 또 그렇다고해서 머릿 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애매한 위화감에 시달리느라 머릿 속을 한참이나 뒤져보던 강림이 벌떡 몸을 일으켜 창밖을 확인했을 땐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다.

 

 

“그럼 답변은 내일 들을게요!”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밝은 목소리로 소녀가 떠나간다. 바보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를 뜯어보려 하는 것까지 확인한 강림은 자리에서 튕겨오르다시피 하며 계단을 내려가 그의 손에 들려있던 편지를 나꿔챘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채 뜯기지 못한 봉투가 두 사람의 손아귀 사이에서 엉망으로 구겨졌다.

 

 

“야, 뭐하는거야!”

“내놔!”

“내놓으라니 뭘?!”

“그 편지!”

“편지? 이건 내가 받은거야!”

“그러니까 내놓으라는 거잖아!”

“뭔 소리야!”

 

 

악전고투 끝에 뺏어든 편지를 쥐고 윗층으로 달려올라가 문을 잠근다. 뒤늦게 쫓아온 강림도령은 문이 안쪽에서부터 걸어 잠긴 것을 보고 어이없는 목소리를 높였다.

 

 

“야, 꼬맹아! 그거 어떤 인간이 나한테 준거야! 그걸 니가 왜 가져가!”

“바보령이 볼 필요 없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학교에서 들었으니까!”

“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잠깐 조용해진 틈을 타 테이브로 밀봉된 봉투를 찢는다. 안에서 나온것은 어울리지 않는 핑크색 편지지였다. [갑작스런 편지를 용서해주세요] [저는 천도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라고 합니다] [실은 지난주에 오빠를 처음 봤을 때부터 신경이 쓰였습니다.]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저는 오빠를 보고 한 눈에 반한 거 같아요] [이런걸 굳이 편지로 쓰는 이유는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기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마음은 진심이에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와 사귀어보지 않으실래요?]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추신. 저 이래 보여도 꽤 인기 많은 편이에요…] 상투적이데다 내숭이 뚝뚝 묻어나는 글귀를 읽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뭐야, 연서잖아?”

“으아악!!”

 

 

기겁을 해서 돌아보면 어느새 저승사자의 복장으로 현관문을 뚫고 들어온 바보령이 있다. 편지를 읽는데 집중해서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강림이 잠시 굳어진 틈을 타 편지를 빼앗은 강림도령은 얼마 되지 않는 편지를 훑어보다 흘끗 강림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뵈도 나한테 보낸건데 왜 네가 뺏어가고 난리야?”

“시끄러. …시끄럽다고.”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고보면 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까지 악다구니처럼 달라붙어 편지를 뺏으려했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어차피 하나는 살아있는 사람이고 다른 한명은 이미 죽은 처지의 저승사자다. 죽었다 깨어나도 연애따위 할 수도 없거니와 할 수 있을 리도 없다.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거절했을 것을 뭐 하러 물고늘어졌는지 이제와서 의아해진 강림 앞에서 강림도령이 픽 웃었다.

 

 

“걱정하지 마. 제대로 거절해둘 테니까. 그나저나 세월 빠르구만. 꼬맹이가 벌써 좋아하는 사람도 생기고.”

“뭐?”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기를 쓰고 뺏아갈 리가 없지.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다만 좋아하는 사람에겐 좋아한다고 고백하는게 좋아.”

“잠깐만,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거야?”

“시치미 떼지마. 너 그 여학생 좋아하지?”

“…….”

“내가 괜히 저승사자 인거 아니다. 알건 안다고.”

 

 

할 말이 없다 못해 아예 말라붙는다. 철렁 내려앉았던 가슴은 잠깐의 냉각기를 거쳐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강림은 현관에 주저앉아있던 몸을 일으킬 동안에도 바보령은 단단히 착각에 빠져 일단 편지로 답장을 하네 마네 하고 있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어디 아주 끝까지 속아봐라, 이 멍청한 저승사자.

 

 

“그럼 부탁하겠는데…. 편지고 뭐고 집어치워. 그리고 며칠 동안은 가게 앞에서 얼쩡거리지 마.”

“어? 하지만 내일까지 답변을 해달라고 하던데.”

“말을 못 알아들어? 괜히 어정대다 엄한 사람 홀리고 다니지 말라고.”

“야 넌 말을 해도 무슨…. 에이, 알았어 알았어.”

 

 

내가 우리 꼬마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어. 선심 쓰듯 뱉은 말이 신경을 쿡쿡 찌른다. 타이밍 좋게 영체를 감지한 소울 폰의 진동이 아니었더라면 또 소리를 내질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늦게 들아올지도 모르니 문단속 잘해놓으라는 말에 대꾸 한 번 하지 않고 바보령을 보낸 강림은 조용해진 사위에 령충들이 뽈뽈거리는 소리만 남았을 무렵 근처에 있던 우산꽂이를 힘차게 걷어찼다.

 

 

카랑이는 소리와 함께 발끝이 아릿하게 쑤셔온다. 고통을 삭이려 씩씩대던 강림은 바보령이 자리를 뜨기 직전 식탁에 얹어놓고 간 편지를 발견하고 이를 악물며 걸음을 옮겼다. 이제보니 편지지에서 희미하게 딸기향이 나는 것도 같지만 알 바 아니다. 쫙쫙 소리나게 찢어진 단어와 마음을 한데 뭉쳐 쓰레기통에 쑤셔박고 방으로 올라간 강림은 혼자 바득바득 이를 갈며 제 방으로 올라갔다.

 

 

=

 

 

“거절한다는데.”

 

 

점심시간이었고, 남자 아이들은 축구를 하러 나갔는지 대부분 비어있었다. 몇몇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써여 의기양양한 얼굴로 앉아있던 소녀에게 그렇게 전하자 소녀의 얼굴이 단숨이 굳어졌다.

 

 

“그걸 왜 네가 말하는거야?”

“부탁받았거든. 얼굴을 두 번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까 대신 말해달래.”

“너 진짜 유치하다. 이런다고 내가 믿을 거 같니?”

“믿든 안 믿든 네 자유지.”

 

 

할 말은 그 정도면 끝이었다. 자리에서 씩씩대던 여자아이는 그날 오후 예고했던 대로 가게로 쳐들아와 막무가내로 버티다 아무 수확도 건지지 못하고 돌아갔고, 그 뒤로도 일주일 정도 가게를 찾아오다 폭우가 내리던 화요일을 마지막으로 발길을 끊었다. 다른 남자를 찾았거나 포기했거나 했겠지. 어딘가의 순정만화도 아닌데 처음 본 남자에게 사귀자고 매달리는 여자 따위 없는 법이다. 다만 차이다시피 한 소녀가 골동품점 훈남에 대해 어설프게 소문을 퍼뜨린 탓에 툭하면 성가신 질문을 받게 됐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가게 앞에서 사람 홀리고 있지 말라고!”

“이 꼬맹이는 왜 일을 도와줘도 난리야!”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의미로 흥미를 가지는 소녀들도 나오기 시작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