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메 극장판 스포일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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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대는 비어있었다. 뒤이어 냉장고와 찬장을 열어본 강림은 그 안에서 풍기는 허한 기운에 혀를 찼다. 말라붙은 식기, 굳은 반찬통, 그나마 먹을 만한건 허옇게 말라붙어가는 죽 정도였으니 꼬마의 거짓말은 다 들통난 셈이었다. 뭐가 된장국에 계란 부침이냐. 멍청한 애늙은이 같으니.
"이렇게 먹는 버릇 하다간 제 명에 못 산다."
"시끄러워. 어차피 바보령에겐 관계없는 일이잖아."
썩다 못해 곰팡이가 득실대는 반찬통에 넌덜머리를 내며 냉장고 문을 닫은 강림은 제 뒤에 서있는 꼬마를 돌아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의 밉살맞은 얼굴에 헬쓱한 기운이 더해져서 평소의 건방진 분위기는 벌써 저 멀리 도망가고 없다. 약간 과장해서 조금만 더 방치했다간 산 채로 삼도천이라도 건널 얼굴이었다.
"손주가 굶어죽으면 저승간 노인장이 기뻐할 줄 알아? 고집부리지 말고…"
"할아버지 이야기 함부로 하지마!!"
비명은 망치처럼 휘둘러져 집안을 깨부쉈다. 여기저기 좁쌀처럼 흘뿌려져있던 영충들이 꼬마의 비명에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술렁거렸다. 강림은 꼬마의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으려던 생각을 잠시 유보하기로 했다. 헐떡이는 소년의 숨결에서 원망과 설움이 배어나와 마룻바닥을 적셨다.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니가 뭔데!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지도 못했잖아! 난 이제 영영 할아버지랑 얘기도 못해!! 근데 아저씨가 뭐나 된다고 나한테 큰소리 잔소리야!! 그냥 여기서 꺼져!! 꼴도 보기싫어!"
부서진 허공에서 무거운 침묵이 줄줄 흘러나와 부엌을 틀어막는다. 제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는 꼬마 강림의 모습을 응시하던 강림은 짧게 혀를 차고는 울먹이는 꼬마의 곁을 지나쳐 나갔다. 그럼 네 마음대로 해. 꼬물거리던 영충들이 안절부절 못하며 그의 길을 막으려고도 해봤지만 저승사자의 걸음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이윽고 현관문이 닫히고 계단을 걸어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꼬마 강림은 연신 코를 들이키며 축축한 눈가를 소매로 비볐다. 까슬한 감촉이 닿아 피부가 아팠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가 기뻐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있다. 하지만 그걸 알고있는 것과 몸이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전에는 하루가 머다하고 몇 번씩 지어야 했던 쌀밥이 하루해가 다 저물도록 바닥을 드러내지 않고, 늘 고봉으로 밥을 담아주었던 그릇은 텅 비어있는걸 보기 괴로워 아예 찬장으로 치워버렸다. 그런 와중에 자신이 먹을 밥이니 젓가락이니 숟가락이라느니 하는 잡다한 것을 챙기고 있다보면 마치 누가 쏙 빼먹기라도 한 것처럼 기운이 없어졌다. 학교에서 나온 급식도 그놈의 '잔반없는 학교' 어쩌고로 눈을 부라리는 반장만 아니었으면 그냥 다 내버렸을 것이다. 근데 저 망할 바보령은 밥은 먹었냐, 먹었다면 뭐랑 먹었냐 하면서 시시콜콜하게 캐묻더니 남의 집까지 쳐들어 와서 부엌 검사질이다. 그딴 짓 할 기운이 있으면 차라리 할아버지라도 한번 만나게 해주면 좋잖아!!
"…할아버지…"
무릎을 마주댄 바닥은 차갑고 눈물이 떨어진 자리가 미끌거린다. 한참을 훌쩍이던 꼬마 강림은 들어가지 않는 다리에 겨우 겨우 힘을 주며 부엌을 나와 제 방으로 올라가 그대로 입구에 쓰러졌다. 갑작스레 감정을 폭발시킨 탓에 몸이 텅 비어버렸는지 끝없는 잠기운만 몰려왔다. 아아, 차라리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 할아버지가 깨워주면서 이건 전부 꿈이었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부엌에서 함께 반찬을 만들고 밥을 지으면서 그렇게 식사하던 그날이 현실이라면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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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그리운 소리가 난다. 잘 달궈진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계란 껍질을 톡 깨서 알맹이를 떨어뜨렸을 때 나는 자글자글한 소리. 자신이 아직 어렸을 때, 반찬 만들기를 돕겠다며 나서는 것을 말리지 못하고 할아버지가 알려주었던 가장 기본적인 요리. 그나마도 노른자가 터져 모양이 엉망진창인 것을 시무룩하게 내밀자 할아버지는 본래 못난게 더 맛있는 법이라며 노른자위가 많은 부분을 자신에게 주었고…
"…야."
"…마야."
계란부침을 배운 것은 그 일주일 뒤였던가? 할아버지를 놀래켜주려고 몰래 도전했다가 재료를 몇개나 버렸는지 모른다. 못난 것을 버리고 예쁜것만 골랐더니 접시 하나가 겨우 찰 정도여서 결국 못난 것까지 함께 올렸었지. 그때도 할아버지는 부침이 중간에 다 끊어져 툭툭 떨어지는 것을 맛있다고 즐겁게 드셨지만 식사 끝에 슬쩍 먹어본 부침은 소금이 너무 적게 들어가 밋밋하니 아무 맛이 없었다…
"꼬마야, 일어나!"
추억은 외침에 짓눌려 터져나갔다. 퍼뜩 눈을 뜬 꼬마 강림은 자신을 지척에서 응시하고 있는 강림의 얼굴을 발견하고 아직 잠기운이 덜 달아난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지금 잠이 덜 깬건가? 왜 바보령이 여기 있지?
"넌 찬 데서 자면 입 돌아간다는 말도 못들었냐?"
"뭐, 아니, 아니 잠깐만. 아저씨가 여기 왜 있어?!"
"그놈의 아저씨 아저씨… 됐으니까 아래로 내려와서 밥먹어."
"밥…?"
그제사 희미하게 느껴지던 음식 냄새가 강림의 몸 쪽에서 풍겨나오고 있음을 깨달은 꼬마 강림은 이를 악물었다.
"그딴 거 안 먹어."
"그딴 거라니. 만든 사람 정성 무시하지마라."
"누가 만들어달랬어?! 쓸데없이 선심쓰지 말고 꺼져!"
"……"
강림도령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꼬마 강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할아버지가 없다면, 밥을 먹을 이유도 의욕도 없다. 그런데도 강림도령은 이전처럼 얼른 사라지기는 커녕 꼬마 강림의 몸을 억지로 잡아들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림이 발버둥을 치고 욕을 하며 주먹질을 해도 꿋꿋하게 꼬마 강림의 몸을 놓지 않은 강림이 소년을 내려놓은 곳은 아니나다를까 계란과 밥과 돤장국이 있는 식탁 앞이었다. 끄트머리가 약간 탄 계란 프라이를 응시하는 꼬마 강림의 뱃속이 사정없이 뒤틀렸다.
"역겨워."
"밥상머리에서 그런 말 하는거 아니다."
"역겹다고."
"야."
"할아버지도 없는데…"
밥은 먹어서 뭐해. 가슴에 꽉 억눌려있던 말이 쩍쩍 갈라져 심장을 찌른다. 꺽꺽 숨을 들이쉬는 꼬마 강림 곁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림은 손을 뻗어 힘없이 늘어진 뒷통수에 제 손을 얹고, 약간 힘을 주어 쓰다듬었다. 약간의 온기와 슬픔같은 것이 머리카락 사이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가족이 죽었다고 해서 네 곡기까지 끊지 마라. 네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저승가서 노인장이랑 재회했다간 노인장 가슴 찢어져."
"네가, 네가 그런걸 어떻게… 어떻게, 알아…"
"…어린 것 놔두고 죽은 사람은 다들 그래. 전부 그러지. 그러니까 슬픈 만큼 울고, 울어서 비운 만큼 먹어."
다들 그렇게 사는거야. 강림의 마지막 말은 소년의 울음소리에 파묻혔다. 한때는 인간이었던 저승사자는 그 물길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며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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