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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마비노기

별은 증오를 품은 채 빛나고

-개인적인 주밀레 설정 있습니다.

-특정 npc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묘사 있습니다.



**************제네레이션 드라마/신의 기사단 스포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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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울새를 죽였나?」


「그건 나, 라고 참새가 말했다.」

「내 활과 화살로 내가 죽였다네.」


"누나, 참새는 왜 울새에게 화살을 쏜 거에요?"


밀레시안은 팔이 살짝 튿어진 곰인형을 바느질 하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은 어린 아이의 앞에는 관에 뉘여진 울새의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쓰러진 새의 가슴에 박힌 화살은 흡사 묘비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옆에는 참새와, 파리와, 물고기의 삽화가 보인다. 밀레시안은 벌어진 천 사이로 시선을 돌렸다.


"…둘이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


낡았지만 깨끗하게 청소된 벽난로에서는 불꽃이 연신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만약 여기 베이릭시드가 있었다면 이보다는 더 그럴듯한 설명을 해줬을지도 모르지만, 마을에 잠시 구할 것이 있다며 타르라크를 맡기고 자리를 비운 그가 언제쯤 돌아올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애초에 저런 그림책을 어디서 사온거야. 천과 천 사이를 꿰매며 밀레시안이 소리 없이 중얼거리는 사이, 동화책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타르라크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붙었다.


"사이가 나빴어요? 왜요? 울새가 참새에게 안 좋은 말을 했어요?"


소년이 던진 순진무구한 질문에 밀레시안의 뱃속이 순간적으로 울렁인다.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틈새를 촘촘히 바느질하는 것으로 자신을 어느 정도 억누른 뒤 입을 열었다.


"…그래. 울새는 친구였던 참새에게 아주 안 좋은 말을 했어."

"으아, 너무해요…. 울새는 왜 그런 말을 한거에요?"

"모두의 행복을 참새가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어? 그럼 참새가 나쁜 거에요?"

 

세계가 얼어붙는다. 아니, 얼어붙고 있는 것은 자신이다. 세계는 어리고 겁 많고 무지한 아이가 따뜻한 벽난로에 앉아 순수한 눈망울을 깜박일 정도로 평화롭다.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녀는 곰인형의 팔을 꿰매었던 실을 말끔하게 잘라내고는 천천히 곰인형을 살펴보았다. 곰인형은 자기가 대체 언제 뜯어졌냐는 듯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타르라크에게 곰인형을 돌려주고 아이가 환한 얼굴로 인형을 소중하게 껴안는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타르라크."

"네?"

"모두의 행복을 위해 참새가 희생했었어야 했다고 생각해?"

"어……희생이 뭐에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는 것. 이 경우에는, 참새 자신의 목숨이지. 쉽게 말해 죽는다는 의미야."


되도록 알아듣기 쉽게 단어를 풀이했지만 겨우 여섯 살 난 아이에게 희생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은 너무 무거운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질문을 도로 거두는 일 없이 묵묵히 상대를 바라보기만 했다. 타르라크는 붉은 눈을 도록도록 굴리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웅…. 이상한 말이에요. 울새도 참새도 다 같이 친구잖아요? 친구가 죽었는데 어떻게 함께 행복해져요? 저는요, 만약에 스승님이나 아이바 형이나 누나가 죽으면 엄청 엄청 슬플 거에요. 하나도 행복하지 않아요! 진짜로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네! 울새가 참새에게 그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으면 좋았을텐데. 스승님이 그러셨어요. 누구에게 잘못을 했으면 우선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게 먼저라구요. 울새는 그걸 몰랐을까요?"

"…모르지는 않았어. 하지만 사과가 너무 늦어서 참새는 울새를 용서해줄 수 없게 되버렸어. 그래서 울새를 향해 화살을 겨눈 거야."

"그럼, 그럼 이 다음에 참새는 어떻게 됐어요?"


참새?

참새는.


"죽었겠지."

"참새도 죽었어요? 왜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밀레시안의 옷자락을 꼭 붙잡은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진득한 피로를 느끼며 반짓고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란히 정리된 바늘이 모닥불의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이 잘 갈린 화살을 연상시켰다.


"모든 게 끝나버렸으니까. 복수를 끝낸 참새에게 이 세상을 굳이 살아갈 이유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어."

"우우…. 울새도 참새도 불쌍해요. 죽은 생명은 무슨 수를 써도 돌아올 수 없는 거라고 스승님이 그러셨는데…."


아니, 그건 틀린 말이야. 돌아온 사람은 있었어. 그것도 내 눈 앞에 있었지. 지금은 과거형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말이 마른 혓바닥 위에서 무너져 내린다.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훌쩍이기 시작한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밀레시안은 발작하듯 짧게 웃었다.


"거짓말이야. 참새는 죽지 않았어. 왜냐면 울새를 죽이지 못했거든."

"그럼, 그럼 장례식은요?"

"장례식 따윈 없었어. 사실은 누구도 죽지 않았으니까. 모두는 친구였고, 아무 오해도 없었고, 아무런 배신도 없었어. 그냥 모든 것이 잘 꾸며진 장난이었던 거야."


막이 내려가면 그걸로 끝나는 한 편의 연극처럼.

표지를 덮으면 그대로 끝나는 한 권의 소설처럼.


"그럼 울새와 참새는 계속 친구인 거죠? 다행이다!"


소년이 물기 남은 눈으로 활짝 웃는다. 밀레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닥불은 부드럽게 일렁거렸고 이따금 날리는 불티가 허공을 춤추다 가만히 내려앉았다. 밀레시안은 조금 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부엌 찬장 위에 타르라크가 좋아하는 쿠키가 있다는 베이릭시드의 말을 기억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선한 우유 한 잔에 나무 접시 위에는 작은 쿠키를 다섯 개. 겸사겸사 주전자에 물을 끓여 찬장에서 발견한 허브차를 우려내던 밀레시안은 먹으라는 간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타르라크를 발견하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 안 죽어."


주전자를 거쳐 찻잔 안에서 피어오르는 허브향이 은은하다.

그녀는 보란 듯이 한 모금을 마시곤 잔을 내려놓았다.


=


베이릭시드는 결국 타르라크가 한껏 과자를 먹고 행복한 잠에 빠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필요한 물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히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인 모양이다. 아니면 도중에 도렌을 만나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긴 논쟁이라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타르라크가 잠든 동안 가벼운 산책이라도 할 생각으로 긴 코트를 어깨에 걸친 채 집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던 밀레시안은 집 뒷편에 다다랐을 무렵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아이를 꽤 잘 돌보시는군요."

"…겨우 그걸 관찰하기 위해 조장이 왕림할 정도라니, 알반 기사단도 꽤나 할 일이 없어진 모양이네."

"설마요."


나무 그림자가 뒤섞인 숲 속에서 전신에 갑옷을 걸친 남자가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낸다. 나뭇가지 사이로 드문드문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받은 금색 머리카락이 빛났다. 밀레시안은 철그럭거리는 발소리가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걸 바라보다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몸이 긴 나무 그림자에 가려져 검게 물드는 가운데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아발론 게이트에서의 전투 이후 선지자들을 문 안에 붙잡아 둘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도의 발생이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거기다 전투조의 한 축이었던 아르후안 조가 아발론 게이트의 경비 임무에 투입된 지금은 더더욱 인력 부족이 심각한 실정이구요."

"그런데 왜 여기 있지?"

"말씀 드렸잖습니까. 밀레시안 씨는 특급 주시대상입니다. 게다가 장소가 장소니까요."

"무슨 의미지?"

"저희가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에 질문이 얽힌다. 밀레시안은 그림자 속에서 말없이 팔짱을 끼며 톨비쉬를 바라보았다. 빛을 받은 갑옷의 반짝거림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주십시오. 드루이드 노인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아이를 봐주던 당신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놀란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다 거의 실신할 뻔한 큰 사건이었지 않습니까."


저 멀리 치워버리고 가림막을 씌웠던 기억이 아무렇지 않게 들춰진다. 밀레시안은 어깨에 걸친 코트에 가려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을 팔꿈치에 조용히 손톱을 세웠다.


"그렇잖아도 여신 마하를 되돌려 보낸 이후 당신의 행동이 다소 혼란스러워졌다는 인상을 받고 있던 차였습니다. 싫어도 인상에 남게 되지요."

"그래서 바쁜 와중에 직접 납시었다?"

"뭐, 그렇게 됩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무사하시군요. 이번에도 쓰러지시면 밀레시안 씨도 밀레시안 씨지만 그 어린 드루이드를 어쩌면 좋을까 여러모로 고민했었습니다. 많고 많은 장소를 골라 하필 그 아이 앞에서 쓰러진 것은 밀레시안 씨 나름의 작은 복수입니까?"

"복수라."


밀레시안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휘어졌다.


"내가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부러 그의 눈앞에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완벽하게 틀렸어. 애초에 그건 자살도 아니었다고."

"그럼?"

"추리해봐."


주인이 자리를 비운 드루이드의 집에는 오직 두 사람 뿐이었다. 한 사람은 그녀에게 주어진 칭호를 세려면 양 손가락을 꼽아도 모자란 불로불사의 밀레시안. 또 한 사람은 사라진 세 용사 중 한 사람이자 밀레시안의 힘을 이용해 신들을 이 세계로부터 떼어내고 진정한 낙원을 강림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기억조차 모두 잃은 작고 어린 투아하 데 다난.


그날 두 사람은 드루이드의 집에 있던 평범한 허브차를 마셨고 밀레시안만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독의 출처는 밀레시안이 던바튼 개인상점에서 구매한 포이즌 포션 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알반 기사단은 밀레시안이 어떤 심리적 이유로 인해 어린 드루이드 앞에서 자살을 택한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그게 오답이라면.


"…드루이드를 죽이려 했군요."


밀레시안은 목까지 차오른 마른 웃음을 토해냈다. 맑은 주홍빛 허브차 안에 보랏빛 액체가 물감처럼 퍼져나가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약을 부어넣은 차는 넣지 않은 쪽보다 확연히 색이 더 짙어 손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녀는 두 잔의 차를 나란히 들고 아이가 기다리는 자리로 돌아가 색이 더 짙은 차를 타르라크 앞에 내려놓았다. 허브 차는 처음이라 좀 쓸지도 모르니 설탕을 좀 넣어 먹으라는 말을 들은 아이는 각설탕을 하나 집어넣고는 잠깐 고민하다 슬그머니 각설탕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하나 더. 그리고 다시 하나 더. 그녀는 제 찻잔을 앞에 둔 채 타르라크의 작은 손끝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도저히 용서가 안됐어. 그가 차라리 그대로 사라져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헌데 어중간하게 되살아나선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순진한 얼굴로 먹고 웃고 울고 이야기하고 살아가는 모습이라니…. 정말 얼마나 죽여 버리고 싶었는지."

"하지만 역으로 독을 먹은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직전에 마음을 바꾼 건가요?"

"아니. 멍청하게 찻잔을 헷갈렸어."


오밀조밀하고 작은 손. 그녀는 그와 매우 흡사한 손을 알고 있었다. 그 손의 주인이었던 메이드 베티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 그녀였다. 천둥 치던 밤의 던바튼 학교. 피에 젖어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던 의복과 창백하게 질려가던 입술. 눈물에 젖어 서서히 흐려지던 눈동자. 밀레시안이 붙잡은 손은 차가웠고… 잠시 후에는 더 차갑고 묵직해졌다. 그 순간 밀레시안은 세계가 통째로 기울어지는 감각을 분명히 느꼈다.


물론 다난이 죽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손을 쥐고 있었던 인물이, 자신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들이쉬던 인간이 마침내 숨을 거두는 감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제 곧 두 번째 경험이 시작될 터였다. 눈앞의 어린 아이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오염시킨 그녀의 영혼에 인해 목숨을 잃는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제 안에 소용돌이치는 상념들을 곱씹었다. 그래, 이 감정들은 당신이 내게 준 아름다운 선물이지. 이 차는 그 보답이라고 생각해.


(하지만)(그때 느꼈던)(세상이 기울어지는 것 같던 감각은)(그보다 더 심해지겠지.)(기울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로꾸거 야거힐집뒤)(마아 생평 지겠리버혀집뒤)(걸그 ?어겠있수딜견)(?응)(하지만 복수를 하지 않고 어쩌겠다는 거야)(럼그 그 는가져워가차 을눈 히만가 ?어겠있수볼라바)(를기핏 는가어잃 을술입 ?어있수할시응)(게렇그 린버혀집뒤 서에계세 속계 ?어있수살)(,니아 수릴버어죽 ?어겠있)(를수복 고하성완 에무허 ?어겠있수질켜삼)(?응)(그럼 이번에도 실패할 셈이야?)


아이의 품에서 곰 인형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누구에게 받았는지 몰라도 무척이나 아끼는 물건이기에 아이는 망설임 없이 몸을 굽혀 인형을 주우려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탁자 위를 지켜보는 것은 오로지 그녀 뿐이었다. 아이는 인형에 영 손이 닿지 않는지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다 마침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찻잔은 손잡이의 위치조차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차를 마시던 아이는 이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누나, 설탕을 넣었는데도 맛이 이상해요. 네가 처음 마셔서 그런가보지. 밀레시안은 그렇게 대꾸하곤 자기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아이가 마신 것에 비하면 확연히 색이 짙은 차는 설탕 맛이 너무 진해서 본래의 허브 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눈을 감고 차를 남김없이 마시며 생각했다.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달군. 이딴 걸 먹었다간 혀와 식도가 남아나질 않겠어.


잠시 후 검붉은 피가 목구멍을 타고 터져 나왔다.

그녀 마음속을 헤집던 감정들과 퍽 비슷한 색이었다.


"그렇게 실패했더니 내 자신이 한심해지더군. 그래서 더 이상 그 집에 가지 않았어."


적어도 그 작고 오밀조밀한 편지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지금도 그 드루이드를 죽이고 싶습니까?"

"지금? 지금 죽여서 어쩌자고. 그 안에 있던 진짜 '타르라크'는 사라졌어. 지금 와서 죽여봤자 타르라크랑 똑같은 이름을 가졌을 뿐인 엉뚱한 애가 죽을 뿐이야. 이이상의 살인 경험은 사양하고 싶네."

"그렇습니까. 잘 알았습니다. 역시 당신은 다정한 사람이군요."

"내 이야기의 어딜 들은 거야?"


톨비쉬는 그저 평소와 같은 깔끔한 얼굴로 웃을 뿐이다. 

밀레시안은 뱃속이 따끔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주셨다는 건, 제가 어느 정도 밀레시안 씨의 신용을 얻은 것이라 생각해도 좋을까요?"

"아니, 얻어 걸린거야. 여기에 있었던 사람이 아벨린이나 피네나 카즈윈이었더라도 이야기는 똑같이 흘러갔겠지. 상대가 알터라면 좀 생각해봤겠지만."

"그렇습니까? 하지만 지금 이 이야기를 들은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저지요. 원하신다면 이 건은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말해도 상관없어."

"하하."


남자의 웃음소리는 늘 속을 알 수 없었다. 밀레시안은 몇 마디 말을 더 던지려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흥얼거리는 노래 가락을 듣자하니 베이릭시드가 오랜 외출을 끝내고 드디어 귀가하는 모양이었다. 밀레시안이 잠시 베이릭시드의 콧노래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어느새 그녀의 뒤로 다가온 톨비쉬가 하얀 코트에 덮인 등을 조용히 두들겨주었다.


"밀레시안, 그대는 자기 자신을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어. 자네는 다른 누구보다 타인에게 신뢰받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일세. 조금 더 자신을 소중히 여기게나."

"그게 유아 살인 미수범에게 할 말이야?"

"음, 좋은 기회니 한 가지 일러두지. 그대는 거짓말이 서툴러."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조만간 기사단 측에서 연락이 갈 걸세. 그게 자네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군."


말 중간에 끊지 마. 또 사도 잡이라도 시킬 셈이야? 밀레시안이 던진 말에 대답해주는 대신 톨비쉬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고 숲의 어둠 사이로 사라졌다. 그녀는 무성한 나무줄기 사이를 바라보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늙은 드루이드를 향해 걸어갔다. 한 박자 늦게 그녀를 발견한 드루이드가 주름진 손을 흔들었다.


"밀레시안! 이 늙은이를 마중나와준겐가? 이거 기쁘군."

"베이릭시드."

"으응?"

"왜 나와 그 아이만 두고 나갔지?"


당신은 그때 내가 그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잖아.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토록 위험한 인물을 소중한 자기 제자와 함께 두려고 하진 않을 텐데. 게다가 우리 둘만 남겨두고 이렇게 늦게 돌아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야? 밀레시안은 흡사 심문이라도 하듯 질문을 쏟아냈고, 노인은 질문의 화살 앞에서 수염을 쓰다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밀레시안, 자네가 쓰러진 이후의 일을 기억하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밀레시안은 독과 피로 번져버린 기억을 더듬어보다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울고 있었다네. 그러면서 자네의 몸에 매달린 타르라크의 몸을 꽉 껴안고 있었지."

"기억에 없어."

"내가 기억하고 있네. 흡사 가족을 잃어버리길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지."

"누가 아이야."

"자네 같은 젊은이들은 모두 내 손녀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멀리서 새가 날갯짓 하는 소리가 들린다. 밀레시안은 자신보다 키가 작은 노인을 내려보다 짓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뒤엉킨 팔뚝 끝의 손톱이 무방비한 살을 파고들었다.


"나는 당신이 이해가 안 돼. 겨우 그따위 걸로 나를 믿고 있어? 손녀딸을 닮았다느니, 피투성이로 타르라크를 안고 있었다느니…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야? 나는 어린 아이를 죽이려 했잖아. 좀 더 미워하고 싫어하라고. 내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대는 꼭 증오라는 감정을 처음 안 아이처럼 구는군. 사람은 증오만으로 살아가는 생물이 아닐세. 지금의 그대처럼, 훨씬 더 복잡하고 섬세한 존재지."

"…난 과거를 잊을 수 없어. 분노도 잘라낼 수 없어. 그래도 나를 믿겠다는 거야?"

"그건 애석한 일이지만 자네를 내칠 이유는 되지 않네. 애초에 자네가 진짜 교활하고 나쁜 인간이었다면 막판에 마음을 바꿔 대신 독을 마시거나 자기 마음을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놔주지도 않았겠지."


노인은 팔짱을 끼고 있던 밀레시안의 한쪽 손을 끌어내어 붙잡고는 천천히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보다 좀 들어보게, 오늘도 뱅크의 데이비 그 친구에게 가서 맡겨둔 와인을 달라고 시치미를 뗐더니 싫은 티를 내면서도 괜찮은 술을 또 척하니 꺼내주지 뭔가. 매일같이 투덜거리긴 해도 참 좋은 친구야. 그래서 그걸 안고 가는데 도렌과 딱 마주쳐버려서 말일세. 괜히 젊은 친구 앞에서 추태부리지 말고 품위를 지키라는 말을 어찌나 줄줄이 하는지 나도 질 수는 없어서 대꾸해주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되어 버렸지 뭔가. 덕분에 겸사겸사 아이바도 보긴 했지만 말일세. 하여간 도렌은 그 깐깐한 성격이 흠이야.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좀 융통성이 생겨도 좋을 텐데 말일세. 그나저나 타르라크는 아직 낮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지? 어떤가, 밀레시안. 노인네를 말동무 삼아 와인이라도 같이 한 잔 하지 않겠나?


밀레시안은 변변한 대꾸도 없이 그저 노인의 발걸음에 맞춰 걸어가다 마지막 말과 함께 그가 내민 와인을 얼떨결에 넘겨받았다. 보아하니 제법 도수가 있는 술인 모양이지만, 달고 끈적이는 독의 차를 마신 이래 어지간한 술로는 머리에 취기가 돌지도 않았다. 이번 한번만이야. 드루이드의 집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비탈길을 오르며 그녀가 뱉은 대답에 베이릭시드가 웃었다.


"그것 보게, 자네는 좋은 사람이야."


밀레시안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척을 했다.


=


며칠 뒤 알반 기사단 전 조장의 동의 아래 밀레시안이 새로운 특별조의 조장으로 임명되었다는 편지가 전달되었다. 밀레시안은 그 편지를 오랫동안 읽어보다 톨비쉬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떠올리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런 의미였군.


어쨌든 불린 이상 그쪽으로 가보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밀레시안은 가벼운 채비를 하고는 아발론 게이트로 향했다. 울새가 지저귀는 울음소리가 잠깐 귓가에 울렸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