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의 그이와 그이의 그이가 포지션 체인지되었습니다.
↑위 문장을 이해할 수 없는 분들의 감상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트친 유성 (@ AAA_meteor)님의 트윗에서 소재를 빌려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체적인 해석 및 설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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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오도아는 천천히, 시간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20대에는 괜찮았다. 30대에도 농담을 나눌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40대… 그것도 중반을 넘어서기 시작할 무렵 세오도아는 거울과 시계와 뒷마당에 나오는 해충들을 거의 동등한 존재 취급하기 시작했다. 루가 보는 건 좋아, 루와 같이 보내는 시간은 상관없어. 하지만, 하지만 나는. 언젠가의 가을날, 루메르트가 마을 시장에서 오랫동안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동안 집안의 거울을 다 깨버린 세오도아가 천천히 중얼거린다.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팔뚝과 손끝에 남은 상처에서 핏자국이 번져 나왔다.
루메르트 오토마이어는 그것을 천천히 닦아내고 소독한 뒤 꼼꼼하게 약을 발라 붕대를 감아주고, 세오도아를 침대까지 옮겨서 도닥였다.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서로 그럭저럭 신체 능력이 비등비등했으나 지금은 근력을 포함해 여러모로 루메르트 쪽이 우위에 있다.
"루."
"응."
"미안해요."
찌르륵, 하고 가까이에서 풀벌레가 운다. 아마도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둔 사이에 방울벌레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들어와 숨어있는 모양이었다. 루메르트는 손을 움직여 세오도아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자기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성격이 되지 못하는 연인이 훌쩍이고는, 제품에 이마를 천천히 비벼왔다. 대체로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 그가 이런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꽤나 드문 일이다. 그리고 그 드문 경우마다 세오도아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꽉 들어차 있기 마련이었다.
"뭐가?"
그러므로 질문이 너무 복잡해서는 안 된다. 단순한 질문을 던지면 세오도아가 오랫동안 품어왔을 괴로움을 토해냈다.
"언젠가, 당신을 혼자 두게 될 테니까…."
찌르륵. 또 방울벌레가 운다.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창문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은 일순간의 우연이겠지만 거기서 다시 창문을 넘어 자신이 살던 터전으로 돌아가려면 좀 더 섬세한 '우연'이 필요하다. 그게 없다면 방울벌레는 영원히 제 고향을 다시 만나는 일 없이 홀로 외로운 노래를 부르다 어느 구석에서 말라 죽고 말 것이다.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있어야 마땅한 장소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지도 못하고.
상상하면 얼마나 지독하고 쓸쓸한지.
그래서 거울은 부서진다. 시계는 망가진다. 따뜻하고 조용한 공간에서 무자비하게 흘러가는 시간과 끝이 예정된 사람의 운명을 상기시키는 것이 배제된다. 하지만 배제된다고 해서 시간이나 운명이 없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차라리 인간관계의 트러블이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정원관리 같은 것이 고민이었다면 선조들이 남긴 기록이라도 뒤적여 보련만. 안타깝게도 세오도아 리들의 바람은 유한한 것을 무한하게 만들어 달라거나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태양과 달이 스스로 궤도를 바꾸게 해달라는 것과 같았다.
이른바, 죽고 싶지 않다는 소망.
필멸자로서는 이룰 수 없는 갈망이다.
루메르트 오토마이어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세오도아 리들은 그가 죽은 이후의 미래를 암담해 한다. 뒤집은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마침내 다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함께 하는 시간이 끝을 맞이할 순간을 두려워한다. 이전에는 그래도 두려움에 눈이 멀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자는 것으로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었는데.
루메르트는 다정하게 세오도아의 등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그것 뿐이야?"
세오도아는 몸을 한 번 움찔거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메르트는 자신보다 나이 먹었음에도 여전히 키가 작은 세오도아의 모습을 내려다본다. 보랏빛의 머리카락, 하얀 피부, 그 아래의 몸, 안에서 두근거리고 있을 심장, 에서 뻗어 나와 맥박치고 있을 혈관들, 을 따라 뻗어가고 뒤엉키는 근육과 신경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마음의 윤곽을.
"그것뿐 만은 아니지?"
내용물이 거의 굴러나온 항아리의 안쪽을 더듬듯이 천천히 안쪽을 들여다본다. 세오도아의 마음 안쪽 어둑한 부분을 응시하는 것은 루메르트 오토마이어에게만 주어진 권리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침해할 수 없었다. 세오도아가 몸을 빼내려는 듯이 팔을 움찔거린다. 루메루트는 그걸 놓아주지 않았다. 예쁘고 좋은 말만 남기고 음습한 마음은 제 안에만 넣어두고 묵히려는 연인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사랑하고 있는 탓이다.
"전부 말해, 세오."
기력이 쇠하여 제대로 토하지도 못하는 환자의 목구멍에 억지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연약한 점막을 누르듯이 속삭인다. 세오도아는 떨리는 숨을 한번 꾹 눌러 참는가 싶더니.
"추악하고 이기적인 말이에요. 그런데도 듣고 싶은 거에요?"
"네가 제멋대로인 건 충분히 알고 사랑하고 있어."
"당신이 그렇게."
"그런 식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나는. 숨결과 같이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떨린다. 루메르트는 아무 말 없이 세오도아의 몸을 세게 안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칠 생각의 격류로부터 세오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혹은 공포에 물들어 꼼짝하지 못하는 이에게 어떤 확신을 불어넣어 주려는 것처럼.
"나는, 이 세상을 증오하게 될 거야…."
마주안은 이들은 서로의 온기는 느낄 수 있어도 표정은 보지 못한다. 루메르트 또한 어떤 「힘」을 가졌다고는 하나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꿰뚫어 보고 신체 여기저기에 장기를 증식시킬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어서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온기만이 이어진 채로, 오갈 데 잃어버린 말이 뒤엉킨다.
"물론 루 당신은 그럴 일 없다고 말하겠죠. 그렇겠죠. 하지만 그럼, 이 영원한 시간 속에 나는 당신을 홀로 두고 가버리는 게 되는 거야? 그건 싫어. 루의 곁에 계속 있고 싶어. 함께 웃으며 지내고 싶어. 그런데 그게 안 돼. 왜?"
"세오."
"계속 당신과 같이 죽는 방법을 생각했어…."
"……."
"그런데도 당신은 죽지 않았지."
"세오도아."
"이게 운명인가? 이게 내 운명인 거야? 이별하여 잊히고 사라지는 그 따위가!"
"세오도아 리들."
날 선 언어가 연거푸 제품에서 터져 나오는데 정작 자신은 전혀 아프지 않다고, 루메르트는 생각한다. 아마도 이 말을 뱉어내면서 가장 아프고 괴로운 것은 세오도아 본인일 테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오 안의 감정이 이것으로 마지막 찌꺼기까지 분명하게 빠져나왔으리란 사실일까. 그의 연인은 이런 감정을 섬세하게 꾸며내어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영악하거나 이중적인 성격이 되지 못한다. 루메르트는 등을 쓸어주던 손을 멈추고 세오도아의 어깨를 잡아, 몸의 간격을 벌렸다.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이의 얼굴이 어두웠다.
"넌 생각보다 행동 중심이면서, 가끔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한단 말이지."
"……."
"내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까 봐 걱정된다면 다시 태어나서 만나러 오면 되잖아."
"그런 말이…!"
어디 있냐는 듯이 고개를 든 세오도아가 말을 멈춘다. 루메르트는 그 뺨을 살짝 잡아당기곤 웃었다.
"언제 어디에 있던 내가 찾으러 갈게."
"……."
"아니면, 날 못 믿겠어?"
"……루는 믿지만."
"믿지만?"
"정말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잖아요."
"그 부분은 근성으로 어떻게든 해봐."
"여기서 근성론 들이밀어도 곤란하거든요?!"
빽 소리를 지른 세오도아가 긴 한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부정적인 감정의 파도는 한 번 넘어선 모양이었다. 혼자 생각하면 괴물처럼 몸집을 불려가는 온갖 상념들을 정작 입 밖으로 꺼내 이래저래 주고받다 보면 점점 희석되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세오도아가 이걸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이유는 연인에게 솔직히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마음 때문이겠지. 조금 심술 맞은 소릴 했다고 반성하고, 루메르트는 세오의 피부를 꼬집던 손을 풀어 천천히 뺨을 쓰다듬었다.
"세오, 세상을 너무 싫어하지 마."
"왜요."
"내가 있잖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내가 널 상대로 진심으로 하지 않는 말이 있겠어?"
"……치사해."
"그러게."
"치사한 루."
"응."
"약속할 수 있어요?"
설령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으로 추락하고 동에서 떠서 서로 지는 태양과 달이 녹아서 저 머나먼 은하수의 일부가 되고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별자리와 신화가 조각조각 나서 낡은 페이지가 떨어져 나가듯이 잊혀지고 모든 것이 황야가 되어 사막이 되어 바스러져 잊히고 쓸려나가며 부서지고 깨지고 종국을 맞이한 뒤에 우주의 한 줌 먼지에 불과한 세상이 된다고 해도.
만나러 올 거라고.
곁에 있을 거라고.
"만날 수 있어. 찾으러 갈게. 반드시 갈게."
"…정말이지 비겁해."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루가 말하면 넘어갈 수밖에 없는걸 알면서 일부러 얼굴 마주 보게 하는 부분이요."
"그야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나도 너를 사랑하고."
그대로 입맞춤을 남기면, 세오도아의 얼굴이 보기 좋을 정도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
그 약속 기억하죠.
잊었을 거라 생각해?
아뇨.
바람이 시원하네요.
그러게.
루, 조금만 옆으로 와줄래요.
…나, 조금 헤맬지도 몰라요.
괜찮아.
오래 기다리게 할지도 몰라요.
괜찮아.
우리에 대한 일, 전부 잊을지도 몰라요.
괜찮아, 세오. 그건 그것대로 어떻게든 될 거야.
…있죠, 비밀을 하나 알려줄까요.
뭔데.
나 말이죠.
"루가 있어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어요."
시곗바늘이 째깍거린다.
숨결 하나가 줄었다.
*
그날은 아침부터 안개가 끼어있었고, 모든 것이 녹슨 것처럼 끼익 거리는 소리가 났다. 구름 낀 하늘에선 햇살이 제대로 비쳐들지 못해 뺨에 와닿는 바람은 습하고 차갑다. 그런데도 해변가를 걸으며 예쁜 조개껍데기를 줍던 소녀는 밀려오는 파도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계절에 맞춰 두꺼운 코트를 차려입은 남자. 다만 목에 두른 머플러는 조금 낡은 감이 있었다. 왜 새로 사지 않은 걸까? 소녀는 고개를 기울인다. 그 순간에 서로 눈이 마주치고, 남자가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안녕. 좋은 날이지?"
"안녕하세요. 별로 좋은 날은 아닌 거 같지만요."
"흐리고 안개가 끼고 습하고 추워서?"
"다 알면서 그런 소릴 하세요?"
"그래도 난 좋아. 여기 어딘가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든."
아, 사랑에 빠진 사람이군. 소녀는 이 비합리적인 남자에게 장난 섞인 호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이 세상만큼."
"우와아."
"지금은 어딨는지 모르겠지만."
"숨바꼭질 중인가요?"
"응."
"빨리 찾으면 좋겠네요."
"고마워. 조개껍데기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거니?"
으악. 소녀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주머니 속으로 조개껍데기를 밀어 넣었다. 이미 소중히 넣은 것들이 잘각이는 소리를 냈다. 바닷가 귀퉁이에서 반대편에 이르는 걸음 동안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골라낸 연분홍 빛깔들이었다. 대부분은 자신이 쓰려는 걸로 생각하고 그냥 스쳐보게 마련인데 대체 어떻게 눈치챈 거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말 안 해. 난 여기 사람도 아닌데."
"그럼 됐고요."
"소중히 대해주렴."
고개를 들면, 남자는 미소짓고 있다.
"같이 손도 잡고, 멋진 풍경도 보러 가고, 네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다는 말도 해주고."
"아저씨가 우리 할아버지예요?"
"따지면 네 증조할아버지뻘일걸?"
"어휴, 됐으니까 연인분이랑 손잡고 풍경 보고 낯간지러운 소리나 하러 가세요."
"그럴 거야."
바닷바람이 남자의 귀걸이를 스친다. 한쪽 밖에 남지 않은 기다란 금빛. 소녀는 문득 그 바람이 금빛을 머금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는데.
"그 녀석은 내가 없는 세계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로맨티스트시네요. 소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하곤 남자와 작별했다. 몇 걸음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면 남자는 어느새 바닷가에서 사라진 뒤였다. 그의 연인은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작은 가게의 테이블에 앉아있을까, 어느 거리에서 음악을 들으며 걷고 있을까, 아니면 잡화점의 쇼윈도에 전시된 물건을 구경하고 있을까. 문득 남자가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사이 발치에 깨끗한 조개껍데기가 보인다. 곧장 무릎을 굽히고 조심스레 모래밭에서 그걸 주워올린 소녀는 작고 아름다운 무늬를 정신없이 들여보는 사이 방금 만난 남자에 대한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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