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스가 한 쪽 자리에 앉아 손가락을 꺽고 있자니, 익숙한 복장의 여성이 맞은편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평소에는 마을에 남은 유물의 흔적을 살피거나 광장에서 지내는 사람이 일부러 이 앞자리에 앉다니. 파리스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왼손 검지를 문지르다 고개를 들었다.
"뭐야. 테레이쟈."
"꽤나 초조해보여서, 말동무나 해줄까 하고."
"심심한 거라면 신전에 가서 일이라도 돕지 그래?"
"날카롭게 굴지 말라고. 웬들린과 같이 동거동락한 사이잖아."
파리스의 날선 말에도 어깨만 으쓱인 그녀는 한쪽 손을 들어 종달새 여관의 주인인 오하라에게 식사를 주문했다. 샐러드와 빵과 수프. 파리스가 듣기에는 입가심도 되지 않을 듯한 메뉴를 읊던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식사는 했어?"
"무슨 상관이야."
"2인분으로 줘요."
어이, 하고 제지하기도 전에 오하라가 특유의 높은 목소리로 메뉴를 되풀이하곤 분주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파리스는 한숨을 내쉬곤 얼굴을 쓸어내렸다. 할 거라면 차라리 술이 낫다고. 중얼거린 목소리를 귀신처럼 들은 테레이쟈가 앞에서 가만히 팔짱을 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술은 좋지 않아."
"알아, 안다고. 그냥 한 말이야."
부질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메뉴가 나왔다. 테레이쟈가 먼저 수프를 몇 입 떠마시는 동안 파리스는 잘 구워진 빵을 잠시 손에 쥐어보았다. 평소라면 몇 입만에 해치웠을 빵덩어리가, 어째 색만 잘 칠해놓은 종이 덩어리처럼 보였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웬들린과 재회할 셈이 아니라면 좀 먹어두는게 좋을걸."
그 한 마디에 둥그런 빵에 손자국이 남았다. 갓 구워내지는 않은 모양인지 미지근한 열기가 손끝에 감겼다. 파리스는 짧은 욕설을 내뱉고는 손에서 빵을 빼냈다. 빵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졌다.
"괜한 참견이야."
"아끼던 사람이 죽어도 배는 고파지는게 인간인걸."
"재수없는 소릴……."
파리스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테레이쟈는 흘끗 그의 표정을 살피곤 수프를 뜨던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렇네. 방금 그건 실언이었어. 사과하지."
"젠장, 넙죽 머리 숙이지 마. 기분 더 더러우니까."
테레이쟈는 고개를 끄덕이곤 식사를 재개했다. 잠시동안,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야채를 씹거나 수프를 마시거나, 빵을 우물거리는 소리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동안 파리스의 앞에 놓인 음식들은 시선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식어가기만 했다. 고작해야 빵 귀퉁이 몇 점이 그의 입으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렇게 먹고서 기운이 나는게 신기하네. 전에 알손에게 주먹을 날릴 뻔 했다며?"
"그 자식이 멍청한 소릴 하기에 좀 정신차리게 해준거야."
"위령비랬나?"
쯧, 하고 파리스의 입술 사이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온다. 그릇을 거진 비운 테레이쟈가 마지막 남은 빵을 삼키곤 그릇을 옆으로 비껴놓았다.
"뭐, 너무 미워하진 말라고.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닐테니."
"하지만 얼빠진 소리였지. 웬들린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뿐이라고."
"백 일동안 말이지."
파리스는 귀퉁이만 떼어내던 빵을 세게 쥐었다. 억센 손가락 사이에서 부드러운 것들이 무참히 뭉개졌다.
"어이, 먹을 걸로 아까운 짓 하지마."
"시끄러워. 먹어치우면 되잖아."
압축된 빵에서는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제대로 씹지도 않은 덩어리들을 어거지로 삼켜버린 파리스는 그대로 수프 그릇을 들이켰다. 입가로 새어나온 수프 몇 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사이에도 백 일이란 단어가 머리 속을 어지러이 돌아다녔다.
웬들린이 돌아오지 않은 백 일.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백 일.
"초조해하지 마. 어쩌면 모험을 즐기고 있거나, 새로운 감정에 눈 떴을지도 모르잖아."
"뭔데, 새로운 감정이라니."
"사랑이라던가."
"미친 소리."
여성을 상대로 하기엔 좀 거친 말이었지만, 눈 앞의 테레이쟈는 끄떡없는 얼굴이다.
"벨로다크라고 했던가~ 꽤 분위기 있어 보이던걸. 믿음직해보이기도 하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농담이야. 웬들린은 나처럼 사랑에 관심을 가지는 타입이 아니니까."
"나참…."
아까부터 눈 앞의 상대에게 휘둘리는 느낌이다. 파리스는 평소에도 그리 즐기지 않는 샐러드와 빈 그릇을 옆으로 밀어내고는 턱을 괴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는건지."
츄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다. 눈을 뜨기는 커녕 보라색 수정같은 눈물을 흘리더니 몸이 수정같은 것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지하유적으로 들어간 웬들린은 동료들과 함께 어디서 사라진건지 꽤 아래로 내려간 다른 모험가들조차 흔적을 보지 못했다고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함께 갔더라면 이렇게나 초조하지는 않을텐데.
왜 하필 다른 사람을 골라서.
"어쨌건 우리는 여기서 웬들린을 기다릴 수 밖에 없어."
균형을 잃어 미끄러지려던 파리스의 머리 속을 읽은 것처럼 테레이쟈가 입을 열었다. 그런건 당연히 알고있다. 알고 있지만, 생각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웬들린이 다른 사람과 가게 하는게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 가자는 말이라도 했었어야 한다고.
그랬다면.
"동생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단서는 계속 찾아볼게. 당신도 얼빠진 생각은 그만두고, 동생을 좀 지켜봐줘. 어쩌면 목소리는 들릴 지도 모르잖아?"
"……그래."
목소리는 무력하다. 테레지야는 그를 잠시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보지."
"그래."
테레지야가 사라진다. 파리스는 아무도 없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려보다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여관에 앉아 웬들린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꼴이라니. 이래서야 웬들린에게만 의지하는 모양새지 않은가. 마치 다른 마을 사람들이 그녀에게 어떤 영웅담이나 군주로서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처럼.
'…그런 취급만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또 여관의 문이 열린다. 파리스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웬들린과는 전혀 다른 실루엣이 들어오는 걸 보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