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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언라이트

[브레그룬]고아원의 아이들

 

그룬왈드는 기분 나쁘다. 그것이 고아원 아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고, 브레이즈 또한 침묵과 방관으로써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있었다. 우선 말이 없고, 안색이 창백하고, 툭하면 청소장소에서 사라지고, 수녀님에게 혼나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룬왈드는 이른바 맑은 물에 떨어진 검은 조약돌만큼이나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하필 메리아가 호감을 품은게 저 녀석이라니. 그 나이에 느끼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통탄의 감정을 부여안은 채, 브레이즈는 온 신경을 기울여 그룬왈드의 뒤를 추적했다. 메리아가 굳이 그룬왈드에 대한 얘기를 꺼내며 그 조그만 눈을 반짝이던 어젯 밤 잠을 설쳐가며 내린 결정이었다. 이유는 물론 메리아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굳이 혈육인 브레이즈 입장에서 볼 것도 없이, 메리아는 순수하고 연약한- 말하자면 유리 세공품같은 아이다. 당연히 세상 물정도 잘 모른다. 그런 아이가 그룬왈드에게 관심을 가진다는건 큰 문제다. 그룬왈드는 분명 메리아를 불행하게 만들테니까. 브레이즈는 그런 사실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하게 알 수 있었지만, 정작 메리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 뺨만 발갛게 물들였다. 아마 말로 타일러도 잘 통하지 않으리라. 통하지 않을 뿐더러 메리아를 상처입히고 울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룬왈드에게 접근해 주먹이든 말이든 써서 메리아의 눈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을 단단히 경고하는 방법 뿐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고 쭉 둘이서면 살아왔다. 이제와서 알지도 못하는 놈팽이가 메리아를 채가게 놔둘 것 같냐며 붙타는 전의를 숨긴 채 그에게 말을 걸 적당한 기회 -고아원 내에서 싸웠다간 메리아까지 알게 되서 골치아파진다- 를 노리던 브레이즈는 그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재빨리 고아원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그룬왈드는 한참을 걸어, 고아원에선 금방 보이지 않는 언덕배기로 사라졌다. 신발이 잔디를 밟는 소리가 요란스레 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뒤를 쫓던 브레이즈는 행여나 그를 놓칠까봐 걸음을 서두르던 순간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그룬왈드를 발견하고 서둘러 나무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들키진 않았을까 싶어 살짝 내다본 건너편에는 쭈그려 앉은 채 발치를 내려다보는 그룬왈드와 그 아래에서 힘없이 늘어져있는 들고양이가 있었다.

 

죽은걸까.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브레이즈는 축 처진 고양이의 몸뚱아리를 안아든 그룬왈드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뒤를 쫓았다. 고양이를 안고 얼마간 걸어가던 그룬왈드는 툭 튀어나온 바위 아래의 움푹 패인 공간에 도착한 뒤 무릎을 꿇고 오랫동안 무언가를 꼼지락거리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며 그룬왈드의 옆쪽으로 돌아간 브레이즈는 작은 도기 조각을 들고 땅을 파 거기에 다람쥐의 몸을 파묻는 그룬왈드의 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깜박였다.

 

매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선 그룬왈드는 주변의 낙엽을 긁어모아 그 위에 뿌린 뒤 올 때와 마찬가지로 터벅터벅 그 자리를 떠났다. 몸을 납작 엎드린 태 그룬왈드가 시야 바깥으로 사라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다가 매장지로 걸음을 옮긴 브레이즈는 낙엽에 덮여 서투르게 위장된 무덤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그룬왈드가, 죽은 동물을 묻어주었다고?

 

그것은 수녀 중의 한 명이 과거 유명한 불량배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와 거의 동급의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브레이즈였지만 일단 그룬왈드가 브레이즈의 눈 앞에서 동물을 묻은 것은 명백했고, 그룬왈드는 브레이즈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 것 따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브레이즈가 그룬왈드에게 품고있던 인상이란 그룬왈드의 태도와 주변 아이들의 냉대가 섞여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여태껏 민감하게만 대했을 뿐이지 알고보면 그룬왈드도 다른 아이들과 같이 외로움을 타는 단순한 '아이'일런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과 함께 표식없는 무덤 앞에 조심스러 무릎을 꿇던 브레이즈는 발치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에 흠칫 시선을 내렸다. 낙엽을 날려보내고 바위 사이에서 울부짖는 스산한 광풍 속에서, 가늘고 가냘픈 소리가.

 

야 오오오 오오 오오 옹.

 

소름이 돋은 팔로 그룬왈드가 묻었던 자리를 파낸다. 한번 파내졌다가 다시 묻힌 땅이라 한들 돌과 나무뿌리가 섞여있는 흙을 맨손으로 파내서 멀쩡할리가 없거늘, 어떤 무서운 진실을 마주한 사람마냥 미친 듯이 손을 놀리던 브레이즈는 이내 그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손을 멈췄다. 엉망진창으로 헤집어진 흙 사이로 드러난 짐승의 모피는 틀림없이 고동치며 숨쉬고 있었다.

 

"……!!"

 

고양이의 몸을 조심조심 구덩이 밖으로 꺼내들고는 뒤로 물러선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을 넘어 네 걸음. 죽지 않은 동물을 묻어버렸다는 사실보다도 그것을 실행한 그룬왈드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공포를 느끼며 몸을 튼 브레이즈는 건너편에서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타박타박 걸어오는 그룬왈드를 발견하고 마른 침을 삼켰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짧은 단발머리를 마구 헤집어댔다.

 

"너…."

"벌써 꺼내면 안돼."

"……살아, 있었어."

"이제 죽을거야."

"살아있다고."

"얼마 못 가."

"네가 어떻게 알아!"

"보면 알아."

 

툭, 그룬왈드가 다가온다. 그것이 마치 거대한 재앙의 한 걸음이라도 되는 것 마냥 질색하며 물러서던 브레이즈는 이어지는 그룬왈드의 말에 자신이 고양이를 안고있다는 사실도 잊고 힘껏 주먹을 쥐어버릴 뻔했다.

 

"어차피 죽을 생명에 왜 그리 집착하지?"

 

악문 이빨 사이로 분노가 새어나온다. 어차피, 어차피라고?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있으면서도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 가족을 돌보고는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그들 남매를 단단히 아껴주었다. 그룬왈드가 그런 것을 알 리는 없겠지만 그 '어차피'라는 말이 마치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최후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만 같아, 브레이즈는 최후의 이성으로 고양이를 땅 위에 내려놓은 뒤 그룬왈드를 타이르려.

 

"네 동생도 마찬가지야."

 

저항은 없었다. 낙엽의 땅에 등부터 쓰러진 그룬왈드는 브레이즈가 자신의 목을 조르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듯이 브레이즈의 양 손목을 자기 손으로 붙잡아 목을 조르는 힘을 보강해주기까지 했다. 그 얼굴의 미소와 손에 감기는 차가운 목의 감촉이 섬뜩했지만, 이런 녀석에 메리아에게 상처를 남기느니 차라리 자기에게 죄 하나가 새겨지는 편이 나았다. 애시당초 그룬왈드가 대체 뭘 안단 말인가. 메리아는,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동생은, 단지 병에 걸렸다는 사실 때문엔 언제나 언제나 방 안에서만 지내야하는 그 아이는, 누구보다도 행복해져야 한다. 행복해지는게 당연하다. 너같은 것과는 다르다, 너처럼 불길한 녀석과는 다르다, 메리아는, 메리아는, 내가…!!

 

"……오빠…."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청아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든다. 보이지는 않는 언덕 저 건너편에서 사박이는 걸음걸이와 함께 들리는 것은 틀림없는 메리아의 목소리였다. 분명 방 안에서 조용히 요양을 취하고 있어야 하는데 어째서? 아니, 그보다 메리아가 이대로 오게된다면. 오는 도중에 넘어져 다치기라도 한다면.

 

"메리아!"

 

생각을 따르듯 몸의 중심이 손에서 다리로 이동한다. 하지만 도중에 자신을 죽이는 것을 그만두는 것 따위 용납하지 못한다는 듯 그룬왈드는 손수갑을 쉬이 풀지 않았고, 저 멀리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져오는 메리아의 복소리에 한껏 초조해져있던 브레이즈는 뒷일 따윈 생각지도 않은 채 발로 있는 힘껏 그룬왈드의 복부를 가격했다. 불의의 습격에 그룬왈드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서 벗어난 브레이즈는 자신이 구한 고양이에 대한 것조차 잊은 채 언덕 아래로 달음박질치며 동생을 이름을 외쳤다.

 

"메리아! 왜 여기까지 나온거야!"

"그치만, 오빠가 하루종일 안보이니까 무섭고… 수녀님에게 물으니까 오빠가 뒤쪽으로 가는 걸 봤다고 해서…."

"바보야! 그렇다고 이렇게 나오면 감기 걸리잖아! 자, 빨리 돌아가자!"

"응… 근데 여긴 왜 온거야?"

"…그건 돌아가서 얘기해줄게."

 

그렇게 남매는 돌아갔다. 복부를 걷어차인 충격에 한동안 숨도 쉬지 못한 채 땅바닥에 드러누워 그 대화를 엿듣고있던 그룬왈드는 시야 한쪽에 놓여져 있던 고양이마저 자기 힘으로 도망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독한 한기를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