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모르겠어? 소년은 허공을 쥐어짜내는 기분으로 물었고 청년은 간단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 왜 나를 몰라? 그때, 그 산에서, 나를 지켜준다고 했잖아! 사도에게 녹지 않도록, 그래서 기체가 반쯤 녹을 때까지 방어해주다가, 쓰러져서… 그때, 내가 억지로 기체를 열고 들어갔을 때, 날 보고 웃었잖아! 얼굴이 장난아니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사람을 놀림거리로 만들어놓고…!! 꿀럭이는 목소리를 듣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그건 두번째가 한 일이겠지. 투명한 유리처럼,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도 아무것도 비춰주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소년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소년은 토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뭐야, 무슨 소릴 하는거야? 두번째라니? 말 그대로의 의미야. 나는 세번째니까. 너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아. 아무것도. 쐐기를 박는 말이 소년의 머리를 깨부순다.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을 지나쳐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청년의 발소리를 듣고만 있던 소년은 지푸라기를 짓뭉개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장난치지마! 난, 난… 당신을 좋아했다고!! 발소리는 돌아보지 않는다. 멈추지도 않는다. 홀로 씨근거리던 소년은 한바탕 긴 괴성을 내지르고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최악의 실연이었다
그날따라 돌아오지 않던 강림은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비척비척 돌아왔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된 것은 약 한달 뒤, 약을 한 웅큼 먹고 혼절한 그가 병원 응급실에 실려간 뒤의 일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무사합니다. 의사는 사무적이었고 이제는 꼬마가 아니게 된 강림은 가만히 그의 손에 쥐어진 볼펜을 응시했다. 이런 막무가내 방식은 서로에게 좋지 않아요. 제가 설명해드릴테니 관련 절차를 밟으면… 강림은 그 이상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멍청한 동명이인은 퀭한 눈으로 누워있었다. 흐린 하늘.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을 등지고 소년은 말했다. 나랑 결혼하자. 둘이서 키우면 되잖아. 멀리서 하늘이 우릉거리고 강림은 대답없이 웃었다. 휘어진 그림자같이 오싹한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