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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기타

[페르소나3] 겨울 눈발 사이에서 매미 울음소리를 들어

※논커플링

※페르소나3 엔딩 스포일러 있습니다.

※페르소나3 FES는 플레이하지 못했고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습니다.

※공식이 아닌 날조 설정이 존재합니다.


「그 녀석 여름이 생일이래」

 

메일이 온 것은 겨울이었고 한파가 심한 날이었고 당연히 유카리는 목도리에 코트에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헌데 한기가 감도는 플랫폼에서 그 메일을 읽은 순간 등허리에 땀이 한 줄기 흘렀다. 차가운 듯하기도 하고,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사실은 이도 저도 아닌 미지근한 온도 같기도 하고. 그대로 시선은 액정 화면에 붙박혀서 떨어지지 않는다. 천천히 스며나온 숨결은 겨울바람을 만나 하얗게 흐려져선 흩어져갔다.

 

「멋대로인건 알지만, 탐정에게 부탁해서 조사했어.」

 

메일의 스크롤은 아직 남아있다. 한 줄의 사실만으로는 정리될 수 없었을 여러가지 일들이 살짝 두서없는 문장 속에서 점점이 이어졌다. 그 사이 전철이 왔고, 타케바 유카리는 운좋게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한기에 시달린 뺨이 조금 편해진다. 다섯 정거장 쯤 지났을 무렵에는 내부 난방장치 덕분에 몸이 따스했다. 다만 손가락은 조금 굳어있었다.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한 뒤에도,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걸어 집에 도착한 뒤에도.

 

타케바 유카리는 답장을 고민한다. 차라리 답하지 않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힐난의 말이라도 꺼내야 할까. 하지만 지금 드는 생각들을 어찌어찌 문장으로 정돈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구조가 성립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유카리는 일단 핸드폰을 던져두었다. 그 뒤엔 간단한 저녁밥을 먹고 몸을 씻은 뒤 가벼운 스트레칭을 했다. 매일 정해진 루틴을 지키는 게 자신을 지키는 행위라는 말은 오래된 격언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유통기한이 다 된 것도 아니었고, 특히 혼란스러운 일을 겪었을 때는 더욱 유효했다.

 

내친 김에 욕실 청소를 한다. 바로 삼일 전에 청소한 타일과 욕조가 느닷없는 세제와 뜨거운 물 세례를 받고 어리둥절하게 빛났다. 고무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세미를 손에 든 채 구석구석을 닦으며 타케바 유카리는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청소를 끝내고 부엌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생각한다.

 

「그 녀석 여름이 생일이래」

 

그걸.

그걸 왜 이제와서 알려주는거야.

 

지금은.

2020년인데….

 

*

 

「그 녀석 여름이 생일이래.

멋대로인건 알지만, 탐정에게 부탁해서 조사했어.

그야 다들 안 좋아하겠지. 누구는 화를 낼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그때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

알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 정도는 해봐도 괜찮지 않겠어?

적어도 불법행위는 아니잖아. 그치?

 

…그래서 좀 유명한 사람에게 부탁했어.

알지는 모르겠지만, '시로가네'라고 그쪽 업계에선 유명한 사람이야.

일 년 정도 꼬박 대기한 끝에 겨우 의뢰를 할 수 있었다니까.

물론 사정을 전부 설명하진 않았어. 나도 그 정도 구분은 해.

그렇게 의뢰를 하고 요금을 낸 게 저번 달 중순인데 3주도 안 지난 어제 오후에 조사 결과를 전달받았어.

이렇게 금방 알 수 있는거였나 싶더라니까.

그 사람은 자기가 숙달된 탐정이니까 가능한 거라고 했지만.

 

이제 슬슬 궁금하지?

그럼 그 녀석 생일은 대체 언제인거냐 싶지?

미안하지만 바로 알려주지 않을거야.

돈 냈다고 생색부리는거냐 싶은 거라면, 정답이야.

하여간 그 '시로가네'란 말야. 엄청난 대출혈이었어.

나도 순순히 알려줄 수는 없다고.

 

알고싶은 사람은 」

 

*

 

“타케바 선배, 오랜만입니다.”

“아마다 군, 오랜만이야. 이제 대학교 3학년이던가?”

“네. 부끄럽지만 한 해 재수했으니까요.”

“그래도 매학기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다고 미츠루 선배가 칭찬하시던걸.”

“저는 노력파거든요.”

 

“아마다 군, 유카리!”

“후카! 어서와. 일 바쁘진 않았어?”

“난 괜찮아. 우리 학교는 졸업식이 이미 끝나서 한가하거든. 아마다 군도 건강해보여 다행이네.”

“덕분입니다. 키리조 선배와 사나다 선배는 아무래도 늦게 오실 것 같네요.”

“그 사람들은 아무래도 공사다망하니까.”

“그럼 남은 건 아이기스 씨랑 문제의 이오리 선배인데.”

“아이기스는 지금 주차중. 금방 올 거야.”

 

“그나저나 준페이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하필 오늘… 이 곳에 모이라고 하다니.”

“거꾸로 말하자면, 저희 외에 그렇게 말할 사람도 없지요.”

“그에 대해 저는 불만을 가집니다. 준페이는 너무 막무가내입니다. 그렇게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다니.”

“아이기스는 그 메일을 받고나서부터 계속 저 소리 밖에 안 해.”

“유카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여어~ 다들! 약속시간대로 잘 와주었구만!”

“유카리! 원흉입니다!”

“으악! 느닷없이 날 겨누지 마! 이제 네 손은 프로그래밍용으로만 쓰는거 아니었어?”

“하지만 예외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모두들! 늦어서 미안하다. 너무 기다리게 했… 무슨 상황이지?”

“아, 미츠루 선배, 사나다 선배. 신경쓰지 마세요. 이오리 선배의 자업자득이니까요.”

“그런가. 간섭은 힘들다만, 너무 몰아붙이진 마라. 녀석에겐 들어야 할 것도 있으니.”

“선배님들 너무 매정하십니다!”

 

“아무튼 이걸로 전원 모였네.”

 

*

 

“왜 여기로 모이라고 한거야?”

 

타케바 유카리가 말을 꺼낸다. 그건 미묘한 초조함을 억누르기 위함도 있지만, 하여간 이 장소에 오면 떠오르는 기억을 꽉 억누르기 위함이다. 1월 31일 저녁의 학교는 당연하게도 인적이 드물고 여기에 모인 면면들은 이 날을 잊을래야 잊지 못한다. 굳은 마음으로 마지막 결전을 마주한 날.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고 어떤 결말이 확실히 매듭지어진 날. 지금도 이따금 꿈 속에서 속절없이 그 날의 페이지가 넘어간다. 절망과 빛이 춤춘다. 이가 악물린다. 그래도 말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잔혹한 일이었다.

 

“메일로 바로 알려주진 않은 걸 보면 뭔가 목적이 있는 듯한데.”

 

유카리는 모두가 자신에게 그 역할을 양보했음을 느낀다. 아이기스는 유카리의 바로 옆에서 말없이 서있었다. 다른 이들도 가타부타 입을 열지 않고 모두를 이곳으로 부른 이를 바라본다. 이쯤 되면 역시나 자기도 머쓱해지는지, 준페이는 제 목을 몇 번 문질거리더니 헛기침을 했다.

 

“그야, 바로 알려줄 수는 없었으니까.”

“어째서?”

“왜냐면….”

 

왜냐면.

 

이오리 준페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제가 맨 스포츠백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를 내민다. 낡아보이는 편지봉투에 뭔가 적혀있다. 「미츠토 고등학교 2학년 D반─」

 

숨이 얼어붙는다.

 

“…그 탐정이 찾아줬어. 우리 학교로 전학오기 전에, 그 녀석이 쓴 편지야.”

“누, 구에게.”

“10년 후의 자신에게. 다 함께 써서 타임캡슐에 묻은 거래.”

 

머릿속의 달력이 맹렬히 넘어간다. 그때 전학생이 왔던 시기는 약 10년 전의 4월 초입. 그 이전의 학교에서 10년 후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면.

 

“약속한 날에 다들 열어보기로 했는데 몇몇은 오지 않아서 학교 서류함에 같이 보관하고 있던 걸 찾아냈대.”

“…읽어봤어?”

“어.”

 

묘하게 대답이 짧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것은 편지가 너무나 하얗게 빛나기 때문이다. 유카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준페이가 내민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곧장 후회한다. 기껏해야 종이 한 두 장 들어있을 그 무게가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다. 이걸 찢어버릴까, 아니면 이대로 떨어뜨려 밟아버릴까. 분명 이제는 괜찮다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기로 그렇게 정했던 것 같은데 그때의 심정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심장이 괜시리 불안하게 두근거린다. 손끝에서 종이가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그 안에, 뭐라고 적혀있는지 봐줘.”

 

아무런 강압도 실려있지 않은 말이었지만 유카리는 결국 편지를 열어보았다. 입구를 접고 스카치 테이프로 간단히 봉해두었을 뿐인 편지가 맥없이 열리고 십 년 전에 쓰였을 편지지가 천천히 몸을 펼쳤다. 내부에 적힌 문장은 분명 일본어의 형태를 하고있는데도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아득한 과업처럼 느껴졌다.

 

「10년 뒤의 나에게.

여름은 여전히 덥습니까.」

 

그 두 문장 뿐인데.

 

“이런 걸 보여줘서 미안해. 미안합니다. 근데 말이죠.”

 

그 자식, 여름에 태어났대요. 그것도 한여름이에요. 7월 5일. 진짜 안 어울리지 않아요? 그렇게 덤덤한 얼굴을 해놓고선 겨울도 아니고 여름에 태어났다니. 아무리 봐줘도 가을쯤에는 태어났어야 하잖아요. 근데 여름이래요. 웃긴다니까. 나는 그 자식이 여름에 더위 타는 걸 제대로 못 봤어요. 그래놓고 미래의 자기에게 쓴 편지에는 그런 말을 적어놓다니. 보통 고등학생이면 새로운 인연은 생겼냐느니 꿈은 이루어졌냐느니 미래의 나는 어떤 모습입니까 하는 걸 적을 법도 한데. 나는 그걸 보고.

 

그걸 보고.

 

“하나만 부탁할게. 부탁합니다. 부탁하게 해주세요.”

 

이오리 준페이가 허리를 숙인다. 무릎을 굽힌다.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웅크린다.

 

“올해 7월 5일에! 다 함께 그 자식 생일을 축하해주면 안될까요!”

 

논리를 모르겠어. 유카리는 그렇게 말하려다 눈을 깜박인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하늘에서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었다.

 

“네 덕분에… 이 여름이 아직도 덥다고, 그렇게 얘기해주면… 안 될까요!”

 

오래된 상처가 뜯겨나간다. 딱지 앉고 아물었던 자리가 처참하게 찢겨져서 피를 토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흐르는 피는 붉지 않고 투명하다. 눈물이 그러하듯이 다만 흘러넘쳐 자국을 남긴다. 그건 차가운 듯하기도 하고,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사실은 이도 저도 아닌 미지근한 온도 같기도 하고.

 

“멍청아.”

 

유카리는 크게 숨을 들이쉰다. 금방이라도 오열할 것 같은 자신을 제어하며 더듬더듬 입을 연다.

 

“이런 걸, 이런 걸 이제와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무엇도 되돌릴 수 없다. 그런데도 타케바 유카리는 흩날리는 눈발 사이에서 찢어질 듯한 매미 소리를 듣는다. 강한 여름 햇살을, 길가에 늘어선 푸른 가로수를, 짙은 그림자 사이를 걷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그는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손을 들어 눈가를 찌르는 햇살을 가린다. 생각한다.

 

올해도 덥구나.

 

“대체 어쩌라는 거야……!”

 

너무나 추운 바람이 모두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틀림없이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