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쿠장관
당신의 손목에서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들린다. 그러나 당신 마음의 목소리는 무엇 하나 들리지 않는다. 심장고동이 들리는 이 자리, 여기에 있는 내가 당신에게서 제일 멀리 있다는 기분이 들어 아이러니하다.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질문에 대한 답이든 전부 알아낼 수 있건만.
하지만 내가 가장 알고싶은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겠지.
좀비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장관님과 장관님을 죽 보호해온 CP9
정신이 들고보니 재브라의 어깨에 이빨자국이 엉망진창으로 남아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내가 어제 정줄놓고 살점을 마구 물어뜯어댄 결과물이란건 뻔했다. 시발. 미친 정신. 좀비에서 겨우 인간으로 돌아왔는데 생고기를 먹고싶다고 발작을 하는건 또 뭐냐. 미안한 마음에 붕대라도 감아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해서 미라를 하나 만들 뻔했다. 시발. 재브라는 괜찮다고 했지만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그 와중에 카쿠는 옆에서 박수치며 웃고 앉아있었다. 너 다음에 발작오면 제일 먼저 목 물어뜯어버릴거다. 그렇게 말했더니 얼마든지 환영이란다. 제정신인가.
맞관삽질 카쿠장관
이번에 열 다섯 번째다.
뭐가 열 다섯 번째인가 하니 카쿠와 장관이 서로의 마음을 헛짚고 엇나간 횟수 되시겠다. 정부의 숨겨진 기관이자 암묵적으로 살인을 허락받은 CP9이 왜 그런걸 세고 있는가 하면 둘이 서로 좋아하는 주제에 헛다리 짚는게 뻔히 보여서다.
그게 어찌나 뻔하던지 CP9 일원들은 카쿠가 장관의 어떤 모습을 좋아하고 장관이 카쿠의 어떤 행동에 마음이 끌리는지 다 알아챌 지경이었는데, 정작 장본인들은 서로의 마음에 대해선 일자무식이었다. 일자무식이다 뿐인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도가 지나치게 심했다.
하루는 참다 못한 칼리파가 두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서로 좋아하지 않느냐고 직설적으로 찔렀는데, 장관은 마시던 커피를 다 엎어버리면서까지 아니라고 부정하고 카쿠는 카쿠대로 그 무슨 농담이냐며 너스레를 떨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그날 칼리파는 위장약을 한 달치 처방받아야 했다.
오장님 가면썰
이게 뭐지.
"이게 뭔데."
생각한게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난 분명히 스팬담(그것도 왠지 여자인)의 얼굴을 보고싶지 않아서 가면을 쓰기로 했고, 요란한건 취향이 아니라서 오페라의 유령마냥 얼굴 사분의 일만 드러나는 하얀 가면을 주문했다. 틀림없다. 근데 왜....
"아가씨를 위해 제가 열심히 꾸며봤어요!"
블라썸. 네가 범인이냐.
"그냥 하얀 가면이라니, 아름다운 아가씨에게는 너무 밋밋해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아가씨의 이미지를 가면에 장식해봤답니다!"
그래서 가면에다가 금색 테두리를 달고 한쪽 뺨에는 보라색 장미를 그려넣은거냐. 정성 쩌네.
왜 괜한 짓을 한거냐고 묻고싶었지만 그러기엔 블라썸의 다크써클이 양심을 찔러서 도저히 추궁할 수 없었다. 넌 스팬담이 뭐나 된다고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구냐. 그냥 거울에 비치는 얼굴 일일이 가리기 귀찮아서 쓰고 다니기로 한 것 뿐인데.
"아가씨, 부디 착용해주세요! 잘 어울리실거에요!"
알겠다 알겠어. 나는 한숨을 쉬곤 가면을 썼다.
마피아 AU 정보부 간부 장관님과 휘하 CP9
안대가 벗겨졌다. 장관은 뻐근한 눈꺼풀을 몇 번 깜박이다 짧게 말했다.
"담배 있냐."
곧바로 입술에 담배가 물려지고 찰칵, 소리와 함께 라이터 불이 켜진다. 가벼운 들숨으로 담배에 불을 당긴 장관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연기를 길게 뱉어냈다.
그 사이 팔과 다리를 묶고있던 구속구가 끊어져 나갔다. 사위는 조용하다.
"다 죽였지?"
"당연한건 굳이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답한 것은 루치다. 방금 전 장관에게 제일 먼저 담배를 물려준 그는 좀 전의 아수라장을 해치고 온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태연한 모습이었다.
장관은 그럼 그렇지, 라는 듯이 입꼬리만 당겨 소리없이 웃고는 제 앞에 있는 면면들을 확인했다.
"그럼 끝난거네?"
"네."
"좋아, 누가 나 부축 좀 해줘."
오래 묶여있었더니 팔다리가 영 시원찮네. 그렇게 말하는 장관을 루치가 안아들었다.
"아니, 이렇게 말고."
"장관은 오랫동안 감금당해있었습니다. 섣불리 걸음을 내디뎠다간 어떻게 부상을 입을 지 모릅니다."
나 그렇게까지 심한 꼴은 안 당했거든. 장관은 잠시 투덜거렸지만 이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는지 다시 담배연기를 길게 토해냈다.
"알았다. 에스코트 잘해."
"분부대로."
은혼 패러디. 혼담이 들어온 장관님과 작정하고 망치려는 루치.
"무슨 짓이지? 장관의 시간을 1분이나 허비하게 하다니... 네 남은 인생 전부로 보상해야할거다."
"잠깐 기다려 루치! 극비임무라는게 이거였어? 장관의 혼담 망치기?!"
"망치기가 아니다 칼리파. 우리의 목적은 암살이다."
"너무 나갔잖아! 상대는 일반인이야!"
"상대도 각오했을거다."
"그런거였나... 나도 합류하지."
"재브라!"
"난 재브라가 아냐. 냉혹한 킬러 울프 13이다."
"13은 또 뭐야...?"
"불길함의 상징. 이번 달에 장관님이 13회 피를 토하셨지. 루치! 나도 간다. 저런 여자는 장관님께 어울리지 않아."
"이봐...! 하아, 둘 다 가버렸잖아. 어떻게든 막아야해. 도와줘, 카쿠."
"누가 카쿠인감?"
"뭐?"
"나는 킬러 목수 13. 재밌어보이니까 다녀오겠구만~"
블루장관. 거울을 깬 장관님.
동화 속 어느 아가씨는 유리구두를 신고 아름다운 드레스 차림으로 변신했다지. 눈 앞의 남자는 그 동화를 흉내내려다 실패한 듯한 모양새로 욕조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금이 가 버린 세면장의 유리가 물방울마냥 부스스 떨어졌다.
걸쳐놓은 장막은 어딘가가 고장났는지 한쪽이 늘어져있는 상태였다. 블루노는 그 모든 상황을 한 번에 파악한 뒤 자신이 해야할 일을 했다. 구둣발로 들어선 타일 바닥에서 바작, 유리 밟히는 소리가 났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장관은 대답없이 제 오른손을 들어보였다.
유리를 거칠게 후려치면서 생긴 자잘한 상처들 사이로 무언가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유리가 깨지면서 그 조각이 상처 사이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꽤 고된 작업이 되겠군. 블루노는 속으로 자신이 해야할 작업을 생각해보며 장관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일단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저항은 없었다. 블루노는 장관의 몸을 가볍게 안아들곤 세면실을 나왔다. 뒤이어 푹신한 침대 가장자리에 그를 앉힌 뒤 에어 도어로 구급상자를 꺼낸 블루노는 그 잠깐 사이에 침대에 벌렁 누워버린 장관을 보고 살짝 미간을 좁혔다.
"장관님, 치료는 받고 누우셔야지요."
"귀찮아."
"유리조각이 혈관에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위험하라지,"
"치료를 잘 받으시면 초콜릿을 드리겠습니다."
"내가 애냐?"
장관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뒤척였다. 아무래도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좋은 밤 보내시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블루노는 무례를 무릅쓰고 장관의 몸을 들어 상처입은 손이 자신을 향하도록 자세를 바꿨다. 장관은 품에서 뭔가 언짢은 듯한 끙 소리를 내긴 했지만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소독하겠습니다. 좀 따가울 겁니다."
"괜찮아. 좀 전에 진통제 먹었으니까."
그렇습니까. 블루노는 장관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유리조각을 집어내는 작업은 약간의 시간이 들었지만 수월하게 끝났다. 마지막으로 거즈를 댄 뒤 붕대까지 감은 블루노가 자리를 정리하는 사이, 붕대 감긴 제 손을 바라보던 장관이 툭 중얼거렸다.
"난 왜 스팬담이고 지랄이지."
그들의 지령관은 입이 거친 면이 있다.
"스팬담인 것이 싫으십니까?"
"어. 존나 싫어."
블루노는 토를 달지 않았다. 대신에 그가 이전에 건네받았던 프라이빗 뱅크의 수표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카이누의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 침대 위의 장관에 대해 생각했다. 그 모든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
"성공했더라면 좋았겠군요."
장관은 뭐가, 라고 되묻지 않았다. 그저 붕대가 감긴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블루노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다, 제 안에 남아있는 한 마디 말에 발이 묶여 멈춰섰다. 멈춰선 그를, 장관이 비스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다시 모시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장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가 대답할 필요없는 말이었다. 블루노는 그럼 이만 쉬십시오, 하는 말을 남기곤 장관의 침실을 나왔다.
*
다음날 그와 얼굴을 마주한 장관이 말했다.
"너 어제 초콜릿 안 주고 갔다."
이런, 제가 실수를 했군요. 블루노는 웃었다. 그날의 다과는 미식의 섬 쁘티에서 이름을 날리는 쇼콜라티에가 만든 초콜릿 쇼콜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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