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략, 카나메 마도카 귀하.
본 기관에서 전국의 평균적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추첨에서 당첨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 초대장이 발송되는 순간부터 귀하는 "초고교급 행운"으로 분류되어 본 기관에 입학하실 자격을 갖추시게 됩니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동봉된 팜플렛을 참조해주시고 문의사항이 있으시면 행정부로 연락바랍니다.
입학식에서 만날 날을 기쁘게 기다리겠습니다. 』
그것은 분명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 벅찬 행운이었다.
특기나 장기, 잘하는 과목같은 남에게 내세울 만한 장점같은 하나도 없었던 소녀.
그런 소녀에게, 단지 들어가서 졸업을 하는 것만으로도 후일의 성공이 보장되는 학교의 입학장이 날아온 것이다.
비록 그 과정이 '추첨'이라는 다소 볼품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무언가가 수많은 경쟁을 뚫고 자신에게로 도달했다는 사실은 카나메 마도카라는 한 소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그녀는 처음으로 가족들의 곁을 떠나서 생활하는 맏딸을 걱정하는 가족들의 애정어린 격려를 받으며 입학절차를 밟았고, 벚꽃이 피어난 어느 봄날에 조금은 어색한 걸음으로 새로운 자신을 향한 걸음을 내디뎠다.
잘 다듬어진 새까만 아스팔트 길에 새로 산 구두굽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타박, 타박, 타박, 타박ㅡ
=
……
………
……………
…………………………?
마도카는 갈증어린 의문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잠기운이 다 빠져나가지 못한 머리가 살짝 멍했지만 자신이 교실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기억은 떨리는 가슴을 안고 정문으로 들어왔던 기억인데, 대체 언제 교실 안으로 들어와 있었던걸까? 거기다 자신은 언제 여기에 앉아 팔을 베고 잠들었던 걸까? 미적지근한 의문과 둔한 잠기운을 안은 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던 마도카는 멍하니 텅 비어버린 교실을 둘러보다 벽에 박힌 두꺼운 철판을 발견하고 숨을 삼켰다. 척 보기에도 단단해보이는 철판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커다란 볼트로 고정되어있는 상태였다.
"누가 저런 짓을…."
의자를 뒤로 당기면서 일어선 마도카가 허리를 피자 가벼운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무심코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그녀의 남동생인 타츠야와 비슷한 수준의 그림실력으로 그려진 삐뚤빼뚤한 그림카드였다. 희미한 크레파스 냄새가 나는 카드를 주워들어 읽던 마도카는 거기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들의 새로운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디 심기일전해주세요.』
"새로운, 세계…?"
고개를 들자 볼트가 박힌 철벽이 보였다. 창백한 형광등 빛을 받고있는 새하얀 칠판이 보였다. 마도카는 어쩐지 오싹한 기분을 느끼고 조잡한 그림카드를 도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수용소같은 압도감 탓인지 새하얀 책상 위에 놓인 알록달록한 카드가 홀로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더럭 겁에 질린 마도카는 자신을 다독이기 위해 눈을 꽉 감으며 고개를 세차게 저어버리고는 재빨리 교실 앞문으로 걸어나갔다. 바깥에는 아마도 자기 말고도 다른 학생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에게 사정을 물어보자… 그런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온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15명의 소녀들이었다.
"앗, 왔다…."
"이걸로 16명이네요."
"…아, 저기, 너희들은…?"
"이번에 입학하는 신입생이랍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네요."
"그렇구나…."
그렇다는 것은, 여기있는 전원은 모두 무언가에 특출난 재능을 가졌다는 의미가 된다.
마도카는 조금 전 교실에 혼자 있을 때 느낀 것과는 또 다른 아우라를 느끼고 마른 침을 삼켰다.
소녀들 사이에서 귀에 익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때였다.
"어이~ 마도카!! 왜 이렇게 늦었어!!"
"앗, 사야카…! 미안, 어째서인지 잠들어버려서…."
"잠들어? 너도?"
"어? 사야카도?"
"나나 너만 그런게 아니야! 모두들 정신이 들어보니 여기였다지 뭐야."
"게다가 창문이나 벽은 모조리 철판으로 덮여있으니 대체 무슨 영문인지…."
"현관은 아예 영문 모를 태엽 인형으로 막혀있어. 짜증나게!"
"에에…?"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정보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레벨이었다.
마도카가 어쩔 줄을 모르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쩔쩔매고 있자니, 갑자기 누군가의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짧고 가벼운 박수를 정확하게 세 번 치는 것으로 15인분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끌어모은 다음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까만 세라복을 입고 휠체어에 타고있는 깔끔한 외모의 소녀였다.
"모두들, 갑작스런 상황에 혼란스러운건 알겠지만 일단 자기소개를 하지 않겠어요? 기껏 모였는데 서로의 이름을 몰라서야 의사소통을 하기도 어렵잖아요."
"나도 찬성이야. 언제까지나 여기에 모여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세라복 소녀의 근처에 있던 노란빛 도는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자 소녀가 살짝 웃었다.
"고마워. 그럼 말을 꺼낸 나부터 시작할까? 나는 무츠로 쿠노테.
보시다시피 다리가 불편하지만 거기에 너무 신경쓰진 말아줬으면 해."
<초고교급 우등생 무츠로 쿠노테>
만약 그녀가 맞추지 못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녀가 아직 도전하지 않은 문제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천재. 그 학문의 범위는 물리학 천문학 지리학 세계사 미적분 삼각함수 영어 일본어 제 3세계의 언어 등등 그야말로 나열하는 것 만으로도 끝이 없으며 그 지식의 깊이는 전문 대학교수를 상대로 논쟁을 벌여도 아무런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들 한다. 그녀가 타고있는 휠체어는 다리가 불편한 그녀를 위해 인체공학 연구자인 그녀의 아버지가 직접 개량한 것으로, 이름은 페트리샤.
"다음은 내가 할까? 나는 토모에 마미.
ㅡ알고있을지도 모르지만, 외국에서 살다온 탓에 나이가 조금 많아. 하지만 신경쓰지말고 편하게 대해줘."
<초고교급 사격선수 토모에 마미>
어릴 적부터 사격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처음으로 출전한 공식경기에서부터 시작해 공기소총, 공기권총, 클레이, 러닝타겟 부문 등등 사격계의 신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워버린 소녀. 외국 귀족계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다 수제 케이크와 홍차를 마시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로 '사격귀족'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럼 다음은 제가!"
번쩍 손을 든 미키 사야카가 두 손을 허리 근처에 당당히 걸치며 입을 열었다.
"나는 미키 사야카! 그리고 이쪽은 내 친구 카나메 마도카라고 해! 마도카, 인사해야지?"
"어? 어어? 앗, 저기… 그러니까, 카, 카네마… 아니, 카나메 마도카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스스로 나서서 자기소개를 하는 사야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될 수 있는 한 군중 사이에 숨어 구경만 하려던 마도카가 뻣뻣하게 굳어 자기의 이름까지 더듬자, 여기저기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덕분에 마도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정작 마도카를 끄집어낸 장본인인 미키 사야카는 시원스레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토닥이고 있을 뿐이었다.
<초고교급 펜싱선수 미키 사야카>
펜싱 종목 에페, 사브르, 플뢰레에서 모두 우수한 성적을 보이고 있는 펜싱 선수, 본인은 플뢰레 방식을 더 선호하고 있으며, 실력과 더불어 노력을 항상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점이 플러스 요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초고교급 사격선수인 토모에 마미와는 동경하는 선후배 사이로 대회때부터 여러 번 만나 면식이 있다.
<초고교급 행운 카나메 마도카>
(상세설명 생략)
이윽고 수수한 수녀풍의 옷을 차려입은 소녀가 살며시 앞으로 걸어나오며 말했다.
"저는 쿠로이카게 이노리. 하지만 세례명은 엘자 마리아이니 좋으실대로 불러주세요…."
<초고교급 종교연구가 쿠로이카게 이노리>
엄격한 종교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독실한 종교 교리에 따라 자라난 소녀. 성경을 모두 읽고 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나 유교, 아후라 마즈다 등등 전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은 단 하나이며,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같은 뿌리에서 이어져 나와있으므로 그들을 연구하다 보면 '가장 신에게 가까운 종교'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한다.
가만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 소녀의 뺨으로 까만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굉장히 부드러운 그 동작에 잠시 정신이 팔려있던 마도카는 누군가가 자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내렸다. 거기에는 동글동글한 인상의 귀여운 소녀가 있었다.
"저기, 저기이."
"에, 어…?"
"이거 먹어. 줄게."
"아, 와아, 고마워. 넌 누구니?"
"난 아마모노 쿠이. 근데 혹시 치즈 있어?"
"응? 아니… 없는데…."
"그래…?"
마도카의 대답을 들은 자그마한 양갈래머리 소녀는 잠시 낙담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다른 사람에게로 가버렸다.
아무래도 그 아이는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할 요량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치즈 얘기가 나왔던걸까.
마도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바닥에 놓인 동그란 과자를 바라보았다.
<초고교급 파티쉐 아마모노 쿠이>
슈크림, 파이, 케이크, 초콜릿 봉봉, 프레첼, 와플, 밀푀유 등등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의 디저트를 완벽하게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동서양의 조합으로 기존의 디저트와는 또 다른 맛을 가진 새로운 디저트 종류를 몇 백개씩 개발해 특허를 얻은, 그야말로 디저트계의 연금술사.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디저트계의 역사가 완전히 새로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며 현재 그녀의 단독 브랜드인 샤를로트는 이미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고있다.
"나는 사쿠라 쿄코. 이 정도면 됐지?"
"…저는 아케미 호무라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 와중에 자기소개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투로 툭 내뱉고 들어가는 붉은 머리 소녀를 뒤따르듯 검은 양갈래 머리의 소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어눌한 인사를 마치고는 현관 기둥에 등을 기대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조금 지쳐보이는 모습이었다.
<초고교급 용병 사쿠라 쿄코>
외국의 용병집단 '펜릴'에 소속되어있는 소녀. 그 이전까지는 종교인 아버지를 둔 평범한 집안의 딸이었으나 열살 무렵 부모를 포함한 교회의 신자들이 집단자살하는 사건이 발생, 그 이후로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가 세계 각지의 전장에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본인은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 의지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자세한 사정은 불명. 여러 마디로 나뉘어지는 다절편을 무기로 사용한다.
<초고교급 밀리터리 걸 아케미 호무라>
중학생때 반 친구의 대타로 나간 화학실험 콘테스트에서 주어진 재료로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내는 데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이런저런 조합에 도전, 왠만한 사제폭탄 쯤은 수제로 만들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총알이나 미사일의 탄도계산, 수중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미사일의 궤도 측정 및 전투기의 내부 부품 마모에 의한 연료의 낭비량 계산같은 자잘한 문제에도 미세한 오차범위내로 대응하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어 군부대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있다.
뒤이어 누군가가 손뼉을 치며 사람들의 주목을 모았다.
언뜻 보기에는 여기있는 아이들과 동갑이라는 것이 믿기 힘들 정도로 볼륨있는 몸매를 바텐더 복장으로 감싼 채 나른해 보이기도 하고 어쩐지 짜증내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하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있는 소녀였다. 가슴께에 꽂아둔 앵무새 모양 브로치가 무지개 색깔로 반짝거렸다.
"나는 쿠비나시 이카리. 바텐더로써의 이름은 로베르타지만… 여기서 그렇게 불릴 일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초고교급 바텐더 쿠비나시 이카리>
고급 술집 Parrot의 바텐더.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열두살때 처음으로 술을 섞어본 것을 계기로 손님에게 술을 내놓기 시작했다. 당시 "아직 어린 아이에게 바텐더 일을 시키다니 무슨 짓이냐"는 비난도 있었지만, 그녀는 순전히 술 자체에서 느껴지는 향기와 기운, 무게를 기준으로 삼아 일을 했기에 술에 취할 염려는 없었다고 한다. 이후 바텐더 대회에서 규격 외 최연소 참가자로써 화려한 실력을 뽐낸 뒤 예외적인 인정을 받아 정식 바텐더가 되었다.
"어머, 당신은 혹시 겔트루드 디 로젠라이너 가문의 상속녀아니신가요?"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진 담담한 수묵화같던 공간에 갑자기 형광빛 스프레이같은 목소리가 번졌다.
이 공간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통통 튀는 그 소리에 마도카가 시선을 돌리자,
그 끝에는 신경질적인 분위기의 이국적인 소녀와 세련된 옷을 차려입은 소녀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전자는 단단히 팔짱을 끼고있는 것이 아무래도 우호적인 대화를 나눌 맘이 없어보였지만, 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의바르고 싹싹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처음 뵙겠어요, 저는 이사델이라고 합니다!"
"……."
"설마 겔트루드 디 로젠라이너 아가씨를 여기서 만나뵐 줄이야! 정말 기쁘네요!"
"………기뻐?"
"네! 이 고귀한 모습이라니… 지금 당장이라도 벅차는 이 마음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싶네요!"
"웃기지 마라, 저열한 천민주제에."
"……?!"
"감히 너의 멍청한 붓놀림으로 나를 표현한다고? 그런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해."
"그, 그런…."
"말도 붙이지 마라, 이쪽을 쳐다보지도 마라, 기분나빠."
거침없는 독설을 내뱉은 소녀는 자신을 이사델이라 소개한 소녀에게서 완전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정면에서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있던 이사델은 간신히 다른 소녀들을 돌아보며 생긋 웃어보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얼굴 근육이 상당히 굳어있어서 웃음이라기보단 단순히 얼굴에 뭔가의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도카는 불쌍하다는 기분을 느끼며 이사델이 기계적으로 짤막한 웃음소리를 토해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초고교급 상속녀 겔트루드 디 로젠라이너 후시나>
전세계적인 재벌 기업 [겔트루드]의 상속녀. 어릴 때부터 제왕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을 배워왔으며 독자적으로 회사를 만들어 경제 시장에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 다음 주식을 모조리 매각해 중소기업들을 일대 혼란에 빠뜨려 버리기도 하고, 아무도 모르는 어느 나라와 단독으로 계약을 맺어 그곳을 모조리 자신의 사유지로 쓰고있다는 이야기가 있는 엄청난 능력의 상속녀. 향후 그녀가 물려받게 될 재산의 가치는 숫자로 환원하자면 그야말로 끝이 없으며, 만약 그녀가 그 돈을 한번에 풀어버리거나 중도에 상속권을 포기하면 세계시장은 유래 없는 대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예견되기도 한다.
<초고교급 화가 이사델>
회화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 누구나 그녀의 그림을 보면 탄성을 금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사델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운영하는 아틀리에의 이름과 같은데, 신비주의 컨셉이라는 명목 하에 본명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전시전도 자주 열고 파티에도 자주 참석하는 모습이 목격된다. 일부에서는 화가가 아니라 사교계의 아가씨라는 비아냥도 있지만, 본인은 우민들이 자신의 실력이 뛰어나서 훌륭한 작품을 단번에 그려내는 것을 질투하고 있는 것이라 여기고 있다.
공기 속에 퍼져나간 겔트루드의 독설에 꽁꽁 얼어붙은 모두가 어정쩡하게 평정을 가장하는 사이,
아무것도 모르고 이사델의 근처로 다가온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라- 이사델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머나, 카쿠. 아무것도 아니야. 뒤에 있는건 누구지?"
"친구! 오늘부터 친구하기로 했어!"
카쿠라고 불린 소녀의 말에 뒤에 서있던 소녀가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이사델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한 두번 위 아래로 훑어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마음대로 해. 내 알 바 아니지."
"에헤헤, 고마워-"
무정하게 들리는 말일텐데도 카쿠는 싫은 내색하나 하지 않으며 환하게 웃었다.
뒤에 서있던 소녀가 카쿠의 손을 단단하게 붙잡았지만,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두 명의 소녀는 나란히 모두를 돌아보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내 이름은 혼노에 카쿠! 잘 부탁해요!!"
"…아이사레누 카나에요…. 잊어버리실지도 모르지만…."
<초고교급 동화작가 혼노에 카쿠>
네 살때 유치원 뒷벽에다 크레파스로 낙서한 이야기가 유치원 아이들 사이에서 큰 유행을 타고, 우연히 그것을 발견한 유치원 선생님이 도저히 네살이 만들어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완성도에 놀라 그것을 근처 출판사에 보인 것을 계기로 동화작가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녀의 데뷔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안야의 모험] 시리즈는 아동문학임에도 불구하고 명망있는 나오쿠 문학상을 당당히 수상하였으며, 최신간인 [알베르틴의 숨바꼭질]은 전세계로 번역 출간될 예정이라한다.
<초고교급 조련가 아이사레누 카나>
개, 고양이 뿐만 아니라 기린이나 원숭이 등의 야생동물, 사자나 하이에나같은 위험한 맹수까지 순식간에 조련할 수 있는 천재 조련가.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동물을 조련했지만 단 한 마리도 그녀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애를 먹인 동물은 없었다. 직접 마주치지 않고 사진이나 영상 매체를 통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해당 동물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할 수 있다고 한다. 가장 처음으로 조련한 동물은 어렸을 때 놀러갔다가 실수로 미끄러져 떨어진 우리 안쪽의 북극곰 우어만이라고.
"그럼 이번에는 내가 할까?"
두 명의 목소리가 사그러드는 것과 동시에, 머리를 은빛으로 물들은 소녀가 앞으로 나섰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이고 짧게 자른 커트머리 사이로 귀에 박힌 색색의 피어싱이 엿보였다.
"나는 코우게이 시로가네. 기젤라 악세사리의 오너야! 만약 장신구에 관심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을 걸어줘!"
<초고교급 보석세공가 코우게이 시로가네>
유명한 보석세공가인 할아버지 아래에서 자라며 보석세공 기술을 익히고 일곱살때 처음으로 독자적인 상품을 완성시켰다. 그녀의 작품은 왠만한 사람이 아니면 구경해볼 수도 없으면, 만약 경매에 나오기만 하면 무조건 아득해질 정도의 가격에 거래된다. 모 왕국의 공주는 그녀의 장신구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신의 나라에서 나는 보석의 80%를 그녀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주된 특기는 은을 사용한 악세사리 세공으로 쌀알만한 은에 반야심경 글씨를 새겨넣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봐,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야?"
시로가네가 반쯤 몸을 돌리며 팔을 움직이자 반쯤 무릎을 꿇어안고 무언가를 바쁘게 조작하고 있던 소녀가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서슬에 소녀의 손에 쥐어져있던 사각형의 물체가 따각이며 현관 홀 바닥 위에 굴러떨어졌다.
인터넷에라도 접속하려 한 것인지, 화면에는 새하얀 에러 페이지가 떠있었다.
"슬슬 포기해. 이제 자기소개를 하지 그래?"
"큭……."
소녀는 시로가네의 말에 분하다는 듯이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새하얀 에러 페이지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작 핸드폰은 잠시 새하얀 빛을 내뿜다가 도로 새카맣게 침묵할 뿐이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소녀는 부리나케 핸드폰을 도로 집어들어 제자리에서 일어선 뒤 재빠르게 자판을 두드렸다.
타닥타닥 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이윽고 소녀가 모두를 향해 작은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그게 보이겠어?"
"안 보이는데…."
"벙어리인가봐?"
"………!!!"
소녀는 이를 악다물더니 핸드폰 화면을 자기쪽으로 돌리고 빠르게 자판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투다닥거리는 소리 덕분에 자판 아니면 그녀의 손가락이 부서지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키리스텐 하코나. 인터넷에서 '회전유원지 엘리'라는 이름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어. 아마 다들 한번쯤은 들어 봤겠지? 모르면 됐어.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그리고 난 벙어리가 아니니까 어림짐작하지 마!]
다분히 기계적인 나레이션으로 자기소개를 끝낸 소녀 -키리스텐은 또 다시 핸드폰으로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공간에 버튼을 누르는 소리만이 스피디하게 울려퍼졌다.
<초고교급 블로거 키리스텐 하코나>
초 유명 블로그 [회전유원지 ELLY]의 주인. 어릴 적부터 시작한 블로그 활동이 쌓이고 쌓여 유명인사가 된 케이스로, 그녀가 올린 사진이나 한 줄의 글은 그 다음 1초가 지나기 무섭게 온갖 사람들에게 인용되고 그녀가 한번 들린 가게는 그녀의 블로그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넷상에서 맹목적으로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는 왠만한 아이돌 그룹 못지 않을 정도라 명실공히 온라인 세계의 아이돌이라 할만하다. 이따금 실제의 그녀는 블로그에서 보이는 성격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루머를 퍼뜨리는 자로 간주되어 차단당한다.
"으음, 저기- 이제 제가 말하면 될까용?"
마지막으로 나선 것은 헐렁한 스웨터와 바지를 입은 안경 소녀였다.
장난스럽게 말미를 부풀린 소녀는 드레스를 들어올리듯 헐렁한 스웨터 양쪽 끝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저는 엔게키야 미코에요. 연극작가랍니당."
<초고교급 연극작가 엔게키야 미코>
셰익스피어의 재림이라 불리울 정도로 신선한 혁명을 불러일으킨 시나리오 라이터. 그녀의 데뷔작인 '꿈꾸는 슐레이카의 춤'은 연극 역사상 유례없는 관람수를 기록하며 대히트했다. 몇 번인가 영화화 기획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한 그녀는 연극에는 영화가 해낼 수 없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로도 '울라의 숲'이나 '밤의 꽃'같은 명작들을 써내며 줄줄이 히트. 영화에 밀려 사라져가던 연극계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다들 잘 부탁해용!"
엔게키야의 인사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현관홀 근처에 매달려 있던 스피커가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지?!"
"…방송?"
누군가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안녕, 모두들! 지금부터 입학식을 개최할게.]
[그전에 우선 알려야 할 사항이 세 가지 있어.]
[하나는 학교의 이름이 키보가미네에서 발푸르기스 학원으로 바뀌었다는 것.]
[두 번째는 학교의 이사장이 바뀌었다는 것.]
[남은 하나… 그건 체육관으로 모이면 알려줄게!]
[그럼 이만!]
뚝.
……
………
…………….
"어…."
"방금 그거… 뭐야?"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체육관으로 가야하지 않겠어?"
"대체 뭐야, 학교 이름이 바뀌었다느니, 이사장이 바뀌었다느니…."
"모두들 진정해요! 우선, 저 방송대로 따를 수 밖에 없을 것 같네요. 저흰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아무것도 모른다.'
무츠로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휠체어를 조작하는 엔진소리가 울려퍼질 뿐이었다.
=
"어서 와! 내 이름은 큐베! 이 발푸르기스 학원의 이사장이야."
교단에서 모습을 드러낸 생물체는 얼이 빠진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운을 떼었다.
천진난만한 아이같은, 그래서 너무나 소름끼치는 어조….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너희들은 이제 여기에서 나갈 수 없어. 무슨 짓을 해도,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네? 뭐, 나중에 확인해 봐. 싫어도 알게 될 테니까."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건 아니야. 이 안에서 살아간다는 질서를 깨뜨린다면 가능하지."
"그게 무슨 의미냐고? 알기 쉽게 말하자면…."
"서로 죽이라는 뜻이야."
"…그게 무슨 의미지?"
사쿠라 쿄코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녀를 향해 시선을 내린 큐베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초고교급의 용병인 너라면 잘 알텐데? 말그대로, 나가고 싶다면 누군가의 숨통을 끊어버리란 얘기야."
"지금 그딴걸 묻고있는 줄 알아?!"
탓, 하는 가벼운 뜀박질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사쿠라 쿄코는 어느새 교단 위의 큐베를 한 손으로 잡아올리고 있었다.
뿌드득…하고 천을 잡아뜯는 소리가 체육관 내에 울려퍼지면서 뭔지 모를 불안과 불쾌함이 증폭되어만 갔다.
그것은 큐베를 잡아올리고 있는 사쿠라 쿄코에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넌 대체 뭐야… 대체 정체가 뭐냐고!!"
"말했잖아? 이 발푸르기스 학교의 이사장이야. 그리고 슬슬 놔주지 않을…"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교단의 나무조각이 허연 덩어리와 함께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사쿠라에게서 멀리 떨어져 굳어있던 마도카는 파격음이 울려퍼진 뒤에서야 사쿠라 쿄코가 큐베를 그대로 교단에 처박아 버렸음을 알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몸 사이로 보이는 축 늘어진 하얀 다리가 갑자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진정 끔찍한 것은 따로 있었다.
"어휴, 너무하네. 갑자기 그런 짓을 하다니."
툭, 하고 천정에서부터 떨어져내린 하얀 덩어리는 틀림없이 조금 전 자신들을 맞이한 그것이었고, 사쿠라 쿄코에 의해 뭉개진 존재였다. 모두가 아연하게 새로운 등장을 멍하니 지켜보는 가운데, 그것은 사쿠라 쿄코의 앞에서 죽어있는 덩어리로 다가가… 그것을 우적우적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묘하게 리얼한 소리가 귓가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도카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너, 대체…."
"대용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무의미한 짓은 그만뒀으면 좋겠네. 정 서로를 죽이는게 싫으면 여기서 계속 사이좋게 지내면 되잖아? 뭐, 죽이면 죽이는대로 큰일이겠지만."
"……."
"아참, 이 학교에 입학했으니 기념품을 줘야지. 기동시키면 자기 이름이 뜨니까 확인해 둬."
그런 말과 함께 전원에게 나누어진 것은 전자식 학생카드였다.
본인의 것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다시 찾아주지 않고, 왠만한 일로 고장날 일은 없지만 고의로 부술 경우 고쳐주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학생수첩에는 여러가지 기능이 있다는 것 등등을 덧붙여 알려준 뒤, 큐베는 멍하니 수첩을 내려다보고 있는 소녀들을 바라보며 밝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자취를 감췄다.
"그럼, 희망으로 모인 너희들이 절망으로 무너질지 어떨지 지켜보고 있을게!!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소녀들만이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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