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 원의 가장 유력한 차기 언더 보스 후보. 콥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그룬왈드를 두고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은 매우 한정적인 경우였다. 이를 테면 기분이 극단적으로 치솟았을 때, 내부에서 들끓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할 때. 때로는 두 경우 다 해당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으레 일방적인 폭력이 퍼부어지기 마련이라, 그룬왈드는 이번에도 어련히 그러하리라는 심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콥은 그를 브라더라고 부른 뒤에도 품에서 휴대용 재떨이를 꺼내 담배불을 꼼꼼히 제거했다. 보통이라면 당연히 그룬왈드의 손바닥이나 어깨를 재떨이 삼았을 터였다.
"뭘 그리 멀뚱하게 서 있어? 이쪽으로 좀 와보지?"
짐짓 친근한 손짓까지. 그룬왈드는 바다의 짠내와 피비린내가 섞인 창고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악취미적인 오브제처럼 창고 안에 늘어서 있던 거렁뱅이들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콥이 이전에 말했던 '돈만 주면 뭐든 하는 거지들'일까. 오늘은 아예 삼대일로 맞붙게 해서 너덜너덜해지는 꼴을 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중 제일 리더격으로 보이는 남자를 훑어보던 그룬왈드는 그의 칼에 묻은 피가 아직 채 굳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짙은 무채색의 공간에 핏방울 하나, 둘. 그룬왈드는 어쩐지 그 피냄새의 보다 정확한 근원지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콥이 턱, 하니 올라앉아 있는 새까많고 커다란 드럼통. 이제는 그가 훌쩍 뛰어내려 그 자체로 이 공간에 남아있는 검은 드럼통. 그 안에는 누가 있을까.
"내가 좀 재밌는 얘기를 들어서 말이지. 들어볼래?"
"…이런 데서 할 이야기는 아닌거 같습니다만…."
"여기 왕국쪽 짜바리들이 들어온 것 같다."
"……그래서요?"
찾아든 당혹감은 들켰다는 기분보다 이제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기분이 더 강했다. 애초에 추방된 자신을 주워서, 눈빛이 맘에 든다느니 하면서 양아들이랍시고 끌고 들어와 마피아로서 살아가게 한 것은 당신이 아닌가. 이제와서 왕국의 짜바리가 들어왔다고 눈을 희번득거릴 타이밍은 지났다. 그날 그룬왈드를 주운 시점에서부터 콥은 그 이야기를 공공연히 꺼낼래야 꺼낼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뭐지? 콥은 두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룬왈드의 손바닥 안에서 피어난 불꽃이 하얀 끝부분을 새카맣게 물들였다.
"누군지 안 궁금하냐?"
"……누굽니까?"
"너."
총성은 바로 귓가에서 터졌다. 잠깐 의식이 끊어졌다.
고막을 짓찢는 번개가 사라졌을 무렵에야 그룬왈드는 콥이 자신의 어깨를 받침대 삼아 뒤쪽으로 방아쇠를 당겼음을 알았다. 자신의 뒤에는, 누가 있었더라. 꼭 총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금방 떠올리는 것은 힘들었다. 빌, 헬름이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 발치에는 미적지근한 피가 스며들고 있었다. 헐떡이는 신음소리와 비명은 둔탁한 박살음에 파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룬왈드는 몸을 돌렸다. 남자는 들짐승처럼 자신을 뜯어먹는 심해어들 사이에서 손가락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핏발선 초록색 눈동자가 보였다 말았다 했다. 그러고보면 그 남자는 눈동자가 무슨 색이었더라. 콥이 말했다.
"죽여주지? 아주 그냥 깜빡 속았다니까! 이 개같은 년놈들이 한통속으로 나에게 엿을 처먹이는 줄도 모르고!!"
드럼통 뚜껑이 허공을 날았다. 그룬왈드는 아직 멍한 한쪽 귀를 손으로 더듬으며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익숙한 금발과 흑발이 보였다. 하얀 피부, 검은 피부 할 것 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지만 상처와 멍에 물들어 피딱지를 여기저기 달고있는 그 모습은 성욕은 커녕 눈요깃감도 되지 못했다. 노끈으로 팔다리가 우악스레 묶인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콥이 담뱃재를 바닥에 떨궜다. 쓰러진 남자의 이마에 검은 가루가 휘날렸다.
"알아? 이 새끼들, 이쪽 정보를 빼서 연합국측에 슬슬 넘겨주고 있었어. 이걸 보면 우리도 참 대단해졌단 말씀이지. 안 그래?"
"……."
"지금부터 이 새끼들을 처형할거다. 너는 어쩔거지?"
말은 권유라기보다 강제였다. 그룬왈드는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남자의 초록색 눈을 응시했다. 바로 얼마 전에 자신을 전하라고 부르며, 이제야 찾았다고 울면서 자신에게 무릎을 꿇던 남자. 당신을 위해서라면 연합도 왕국도 원래의 지위도 버리고 당신의 개로 살겠다고 망설임없이 단언했던 남자. 그래, 너의 눈은 녹색이었지. 빌헬름 쿠르트.
"저 남자는 저한테 맡겨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만."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어이."
콥은 거지들 중 하나에게 눈짓을 했다. 그룬왈드는 그가 건네는 날카로운 칼을 받아들고 재킷을 벗었다. 심해어는 사라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몸의 상처가 낫는 것은 아니다. 너덜너덜한 상처가 남은 몸. 하지만 인간의 몸. 그룬왈드의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를 본 남자의 눈이 감겼다. 체념인지 분노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그가 감히 짐작하지도 못할 심중 어딘가의 감정인지.
어쨌든 그룬왈드는 한때 자신을 보필했었고, 앞으로도 쭉 보필하려고 했던 남자를 제 손으로 잘게 잘게 찢었다. 셔츠가 붉게 물든다. 손이 새빨개진다. 얼굴에 점점이 튀어오른 핏자국은 마치 첫사랑을 만난 풋소녀의 뺨에 떠오른 홍조처럼.
수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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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그렇고 그런 영상의 촬영으로 돌릴 거리고 했다. 거기까진 취향이 아니었지만 콥이 놔줄 기색이 아니었으므로 그룬왈드는 창고에 딸린 골방의 어둑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여자들은 울진 않았지만 비명을 지르거나 했고 기계가 위압적으로 웅웅거리기도 했다. 남자가 헐떡이는 소리가 들린다. 콥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룬왈드의 피에 젖은 몸을 탐했다. 그룬왈드는 아주 잠깐, 그 녹색을 떠올리곤 그대로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