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그룬]붉은 공포여 새까만 침묵이여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빌헬름은 초조함을 느끼며 손톱을 깨물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길이 막힌다. 오늘따라 유난히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다. 평소라면 그러려니 넘겼을 일이건만 이상하게 자꾸 손에 땀이 고였다. 무언가 불길한 일이 히죽히죽 등허리에 붙어있는 듯한, 그래서 빨리 떨궈내야하는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기분. 길은 붉은 후미등으로 가득했다. 스무번째 통화가 불발되었을 무렵 빌헬름은 그 이상 참지 못하고 경적을 울렸다. 신경질적인 소리가 파드득 거렸지만 거리의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차라리 차를 여기다 버리고 달려서 돌아갈까. 그런 정신나간 생각을 하던 와중에 길을 메운 금속의 무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빌헬름은 욕설을 내뱉으며 핸들을 움켜쥐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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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겨우 도착한 집에는 전등 하나 켜져있지 않았다. 싸늘한 온도.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 벽을 더듬으며 전기 스위치를 찾던 빌헬름은 복도 저쪽 빠끔히 열려있는 욕실문을 발견하고 공포에 질렸다. 도련님, 도련님. 흡사 무슨 주문처럼 되뇌이며 욕실로 가까스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본 빌헬름은 그 안에서 확 풍기는 피비린내와 욕조에 누워 파르스름하게 고개를 꺽고있는 그룬왈드를 발견하고 절규했다. 안돼, 안돼, 안돼!! 달려드는 발 밑에서 칼이 밟혔다. 붉은 물에 잠긴 소년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끌어안은 몸이 차갑다. 새하얀 목에는 칼로 그은 날카로운 상처가 겹겹이 쌓여있었다. 아팠을텐데, 고통스러웠을텐데, 어째서 이런 짓을, 왜 이런 짓을. 빌헬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룬왈드의 목을 지혈하고 핏물에 젖은 가슴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파리한 입술에 숨을 불어넣었다. 여전히 반응은 없다. 그래도,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던 빌헬름은 아뜩한 현기증을 느끼고 그대로 몸을 무너뜨렸다. 수건은 붉다. 도련님은 차갑다. 바싹 안은 몸은 고동조차 없었다.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일찍 돌아오기라도 했어야 하는데. 좀 더 빨리 전화를 걸었다면, 좀 더 다정하게 대해드렸더라면.
자신의 마음을, 그냥 전했더라면.
후회에 짓눌려 눈물이 새어나온다. 차가운 몸은 단지 차가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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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다시피 오열한 빌헬름은 아침에야 겨우겨우 본가로 그룬왈드의 죽음을 전할 수 있었다. 전화를 받은 여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장례절차를 지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시간은 삼분도 되지 않았다. 빌헬름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죠?
도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건 아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도련님이 돌아가셨는데 겨우 그걸로 끝입니까?
뭐라구요?
당신의 막내 아들이 죽었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거냐고 묻고있다!! 이 늙어빠진 여우같으니!!
반대편에선 유리를 잘게 깨부순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전하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신경끄십시오. 어차피 늘 그래왔지 않습니까.
쉰 목소리로 내뱉고 전화를 창 바깥으로 내던진다. 몸을 들끓는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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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뒤, 빌헬름은 호숫가에 차를 세우고 차문을 열었다. 아는 사람이 드물어 그룬왈드와 찾아오곤 했던 한적한 호수에 인기척은 없었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 그 사실을 한번 더 확인한 뒤, 빌헬름은 차 안으로 들어가 그룬왈드가 매고있는 안전벨트를 확인했다. 깨끗한 옷을 입고 목을 붕대로 감은 그룬왈드의 몸은 단단히 고정되어있었다. 그렇다면 충분하다. 빌헬름은 차 안에 들어가 유리를 올리고 차문을 걸어잠근 뒤 호수를 향해 차를 몰았다. 밤호수의 풍경이 물에 잠긴다. 꿀럭꿀럭 시야가 삼켜진다. 그래도 빌헬름은 계속계속 차를 몰아넣었다. 이내 새까만 호수물이 차의 천장까지 집어삼켰다. 이제 차는 엔진이 아니라 호수의 경사면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빌헬름은 핸들을 놓고 조수석에 있는 그룬왈드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차갑다.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모시는 것이 이런 장소여서.
검은 물은 부걱부걱거린다. 이따금 자잘한 것들이 앞면 유리에 부딪쳤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손에 도련님을 넘기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습니다.
토해내는 말은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였다.
마침내 차가 멈췄다. 빌헬름은 깊은 한숨을 토하며 등을 기댔다. 시야는 까맣다. 그렇다고 공포스럽진 않았다. 진정한 공포가 이미 그를 잡아찢어놓은 뒤였으니까.
도련님.
도련님을 사랑했습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도련님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제 심장을 바쳐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도리어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도련님은 섬세하시니까, 도리어 제 감정에 짓눌려 버리실 것 같아서... 하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전부 말해버릴걸 그랬지요. 그랬더라면, 도련님에게 조금은 삶의 미련이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아니, 물론 제 희망사항이지만...어땠을까요. 이제와선 전부 제 상상에 불과합니다.
...사랑합니다 도련님. 세상의 다른 누구보다도 당신이 사랑스러워서 저는 여태껏 살아왔습니다. 당신이 없는 것을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세상 따위 저에게도 필요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도련님은 저를 비웃으실까요.
대답은 암흑. 빌헬름은 충동적으로 조수석의 안전벨트를 풀고 그룬왈드의 시신을 자신의 품에 꽉 안았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하얀색에 눈물이 배어나왔다. 좀 더 일찍, 안아드렸다면, 마음을 전했더라면 이토록 후회할 일도 없었으련만.
도련님...
그저 한탄에 젖어 이름을 부른다. 차갑게 식은 몸을 안는다. 자신의 품에 꼭 끌어안긴 그룬왈드의 몸에 머뭇머뭇 입을 맞췄다. 죽음의 차가움과 사랑에 빠진 이의 열기가 뒤섞였다.
도련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감히 당신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사랑합니다... 이대로 저와 함께 영원히 썩어가주세요.
사랑고백, 혹은 프로포즈라기엔 너무나 절박한 말이 어둠을 밀어낸다. 아무도 찾아오지 못할 검은 물 밑은 침묵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