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님 비맞으신다
먹구름 한 조각 없는 하늘에서 맑은 비가 내린다. 사방을 환히 비추는 햇빛을 받아 흡사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빗줄기 사이로 피어오르는 새하얀 물안개는 봄바람을 뭉쳐놓은 것 마냥 산뜻했다. 그 산뜻한 안개 너머로 보이는 검은 그림자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흑태자 -그룬왈드의 것이겠지. 그 말고는 저렇게 새까맣게 입고 돌아다닐만한 사람도 없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향해 다가가려던 브레이즈는 검은 실루엣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사방에 고여있던 물안개가 약간의 무게감과 습기를 머금는 것을 느끼고 섬찟한 기분에 발걸음을 멈췄다. 홀연히 서있는 그룬왈드의 주변에서 미미한 붉은 빛이 배어나왔다.
그룬왈드.
부르는 목소리는 메아리도 진동도 없이 물 속의 물처럼 퍼져나가며 붉은 색을 더한다. 그 연한 핏빛 물결 속에서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린 그룬왈드가 브레이즈를 발견하고 웃었다. 위태롭고 덧없는 웃음이었다. 소용돌이 속에서 입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의 늪에 삼켜진 이들이나 그런 식으로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룬왈드는 분명 살아서. 거기까지 생각하던 브레이즈는 그룬왈드가 뒤집어 쓴 후드 아래로 보이는 참상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후드가 여며진 가슴 아래의 살과 근육이 좌우로 쩍 갈라져 본래라면 노출되지 말아야 할 내장이나 혈관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주변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던 붉은색은 그룬왈드의 얼굴을 적시며 흘러내린 빗줄기가 내장과 혈관의 피를 흡수한 결과였나. 브레이즈의 경악을 긍정하듯 그룬왈드의 눈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은색 빛 줄기 사이에서 아찔하도록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붉은 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룬왈드의 몸이 후드득 무너져내린다. 침몰하는 배처럼 기울어지는 몸, 급격하게 생기를 잃으며 탁해져가는 눈. 뒤늦게 그를 부축하기 위해 댈려가던 브레이즈의 눈 앞에서 그룬왈드의 팔은 손가락 마디 단위로 분해되며 사라져갔다. 화사하게 빛나는 은빛 빗줄기 사이로 남은 것은 붉은 피 웅덩이뿐이었다.
그제사 뺨에 빗물이 닿는다.
반짝이던 물방을은 뼈가 저릴 정도로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