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그룬]그대의 말이 나를 죽이고 있어
-만우절 브레그룬 봇에서 나온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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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룬왈드,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뭐지?”
밤은 어둡다. 그와 대비적으로 하얗게 빛나는 브레이즈는 묘하게 가벼워보였다. 무언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것을 한 덩이 내려놓은 듯한, 혹은 자신이 이제까지 풀지 못했던 문제의 해결책을 간신히 찾아낸 듯한 홀가분함. 천칭에 올려둔다면 깃털 쪽으로 추가 기울어질지도 모를 정도로 경쾌한 웃음. 그 웃음 사이에서 스며나온 말도 실로 가뿐했다.
“질렸다.”
너무나 가뿐한 말은 홀로 깔깔대며 달아나 버렸다. 이해할 틈도 없이, 서늘한 한기만을 남기고.
“…뭐?”
“제멋대로인데다가 나가기만 하면 맞고 들어오고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지. 거기다 꼴에 왕족이라고 쓸데없는 자존심만 강해서 툭하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런 비난 없이 단지 피를 튀기는 죽음을 상대로만 희노애락을 느끼는 의지박약아. 그게 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끄럽지 않나? 아니, 그런걸 느낄만한 성품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도 않겠군. …페어라기에 최소한 사이좋게 지내려했지만, 장단을 맞춰주는데에도 한계란게 있다. 솔직히 이젠 네가 거추장스러워.”
이해는 남지 않고 형용할 수 없는 오한이 거죽 안쪽에 겨울 새벽녘 서리처럼 들러붙어 가시를 펼친다. 한 줌 온기도 주지 않는 말들이 눈송이처럼 어지러이 흩날릴 때마다 몸 속 여기저기에 웅크리고있던 한기 어린 가시들이 소란스레 술렁이며 내장과 피부를 세차게 긁어댔다. 특히 엉망진창으로 찢겨져가는 가슴은 상처에서 터져나온 혈액들이 흘러나오자마자 뿌득뿌득 소리를 내며 얼어붙을 정도라 그 한기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토록 강렬한 감각에도 불구하고 그룬왈드의 육신은 멀쩡했고, 브레이즈 또한 자신이 뱉은 잔인한 냉언에 그룬왈드가 무슨 꼴이 됐는지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기색으로 마지막 눈보라를 일으켰다.
“헤어지자.“
아니, 그것은 차라리 얼음으로 이루어진 벼락이었다.
웃음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한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룬왈드는 헐떡이며 눈을 비볐다. 일그러지는 시야로도 거추장스러운 것을 내던져버린 브레이즈가 짓고있는 웃음을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교제해오면서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웃음. 그룬왈드는, 정말이지, 그 웃음진 얼굴을 향해 무슨 말이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애정이나 우정은 커녕 오로지 배척받으면서 살아왔던 이가 떠나가는 애정을 도로 멈춰세울 만한 말을 생각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룬왈드가 누군가에게 소유당하고 사랑받았던 것은 이 은발의 협정심문관이 처음이었고, 마찬가지로 이토록 비정하게 버림받는 것 또한 그가 처음이었으니까. 생전 처음 보는 웃음과 냉언이 그를 저버리고 떠나간다. 갈고리처럼 움켜쥔 손가락이 허무하게 곱아가는 가운데 한없이 그립고도 원망스런 목소리가 또 한번 사뿐하게 휘날렸다.
“그럼, 이만.”
길었던가, 짧았던가.
브레이즈는 사라졌다.
방은.
어두웠다.
열려있는 눈커풀과 방에 가득 찬 어둠과 멈춘 숨을 인식했을 때, 그룬왈드는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머리맡에 풀어놓았던 자신의 검을 뽑아들어 그 날을 다듬기 시작했다. 불이 환히 들어오는 방에서 해도 위험한 작업이다. 하물며 충동적으로 한밤중에 배게를 움켜쥐고 하는 작업이 안전할 리가 없다. 당연히 손가락 몇 군데에서 피가 흘렀고, 그 사이 등을 함뿍 적시고 있던 식은땀이 말라붙으며 한기를 남기고 떠나갔다. 찢긴 배게에서는 하얀 깃털이 나풀나풀 피어올랐다. 하얀 한기에 오장육부를 찢기고 냉각당하는 경험에 미하면 어린아이 장난이나 다름 없는 감각을 통해 튕겨날아간 기억의 파편을 긁어모아 전체상을 되그려내는 데에는 얼마간의 상처와 한기, 그리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이 꾸었던 꿈을 모두 기억해냈을 때, 그룬왈드는 붉은 피와 그 핏줄기에 하얀 깃털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손으로 칼을 손질하는 것을 멈추고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손에는 주인의 피를 머금은 왕국의 검을 그러쥔 채 남은 피투성이의 손으로 더듬더듬 어둠 속을 나아가던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브레이즈가 잠들어있을 방문 앞이었다.
문고리는 저항없이 열렸다. 신발을 신는 것조차 잊은 맨발로 브레이즈의 침대로 다가간 그룬왈드는 희미한 달빛이 새어들어오는 방의 침대 위에 침입자를 눈치채지도 못하고 잠들어있는 그를 확인하고는 단숨에 브레이즈의 몸 위에 올라타 움찔거리는 목줄기에 이미 피를 맛보고있는 검날을 들이밀었다. 여기서 조금만 힘을 주면 브레이즈의 목줄기는 피투성이가 되서. (너무나가볍고가뿐해서미칠것같던그시선과냉언과이별이)
그 순간 브레이즈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다시한번)
그룬왈드는 검을 발작적으로 내리꽂았다.
하얀 눈보라.
그 속에서 붉은 것이 튀어올랐다.
=
“…그래서 그 꿈때문에 자고있는 사람 위에 칼을 들고 올라타 있었다고?”
“그래.”
이런이런…하고 고개를 흔들려다 자신의 머리 위쪽 비스듬한 곳에 박힌 검의 존재를 생각해내고 행동을 자제한다. 그룬왈드의 손에서 붉게 물든 깃털이 생각났다는 듯이 팔랑팔랑 떨어져내렸다. 피냄새가 맡아지는걸 보아하니 아마도 손에 상처가 나있는 거겠지. 일단 그룬왈드가 좀 진정이 되면 손을 살펴봐야겠지만….
그룬왈드의 저 얼굴을 향해 대체, 뭐라고 해야 진정시킬 수 있을까.
밤의 어둠과 달빛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깊고 짙은 무언가에게 점령당해 망가져버린 -이런 어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룬왈드의 얼굴은, 여지껏 그룬왈드의 다양한 표정을 봤다고 자부하는 브레이즈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평소의 무표정이라기엔 너무나 많고, 그렇다고 무어라 형용하기에는 완전히 뒤죽박죽이라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얼굴. 그건 차라리 끈적끈적하게 뒤섞인 감정이 얼굴을 칭칭 휘감아 그 자신의 숨통을 압박하고 있다고 표현해야할 지경이었다.
“브레이즈.”
“음?”
그 압박의 틈새에서 새어나온 가느다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이어진 것은 다소 황당할 정도로 난폭한 언어였다.
“내 곁에 있지 마라.”
“…….” 브레이즈는 조용히 그룬왈드를 응시했다.
“너 따윈 필요없어.”
“…….” 얼굴에 휘감긴 감정이 말 한마디 한마디에 녹아들어 툭툭 떨어졌다.
“나는 네가 싫다. 너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야.”
바람이 불었다. 그동안 달을 가리고있던 구름이 그 서슬에 어딘가로 끌려갔는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조금 강해졌다. 그래봤자 여전히 책 한 줄 읽을 수 없는 어둠이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내리꽂은 검과 손잡이에 위태롭게 기댄 채 브레이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자의 얼굴 정도는 읽어낼 수 있었다.
조금 전의 꿈이 평소의 무표정을 깨고, 그 안에 고여있던 감정들이 갈 곳을 잃고 투둑투둑 떨어져 내린 탓이겠지.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의 감정만을 머금고있는 이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브레이즈는 어이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잘도 거짓말을 하는군.”
발작적으로 터져나온 호흡은 웃음을 흉내내려다 실패하고 짧은 헐떡임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뺨을 적신 것은 서릿발이 녹은 듯 투명한 물방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