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미카]KILL or KISS YOU
사람을 죽인다.
그런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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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계단 위쪽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있었다. 주인에게 흠씬 두들겨맞고 버려진 애완동물같다. 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손에 들고있던 열쇠를 만지작거리다가 퍼뜩 지금의 상황을 깨닫고 손에 들고있던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시각은 오전 8시 5분. 왠만한 학교라면 걸음을 서두르지 않는 한 지각으로 결정나버릴 시각이다. 그런데 왜 이 아이는 여기에 쭈그려 앉아있는 걸까. 톰은 슬쩍 몸을 뒤로 빼내 주변에 끓는 점이 극도로 낮은 후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계단참에 교복차림으로 주저앉아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는 소년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이봐, 여기서 뭐해?"
"……."
대답은 없다. 톰의 목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던 소년은 그의 얼굴만을 확인하고는 도로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에 상대의 얼굴을 파악한 것은 톰도 마찬가지다. 그는 조금 곤란한 기분을 느끼며 얼굴을 긁적였다. 방금 전까지는 후배의 모습이 없다는 것에 안도했지만 지금은 후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껄끄럽다. 아마 이 이케부쿠로에서 유일하게 시즈오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그 소년을 어색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톰은 어쨌든 안에라도 들이자는 생각에 징수사무소의 문을 열며 소년에게 말을 건넸다.
"…추운 데에 있지말고 일단 들어와."
소년은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계단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팔에는 대체 무슨 소중한 물건이 들어있는지 모를 정도로 강하게 안겨있는 가방이 있었다. …아니, 소중한 물건이 들어있다면 오히려 저 정도로 심하게 껴안고있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단순히 심리적인 안정감이 필요한걸까. 톰은 심리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진행시켜 나가며 소년의 등 뒤에서 문을 닫았다. 소년은 익숙한 걸음걸이로 징수소 내부의 소파 위에 웅크려 앉았다. 또 다시 주인에게 얻어맞고 밖으로 내쫓긴 애완동물이 생겨났다. 톰은 대체 언제나 후배가 올까를 생각하며 어색한 침묵을 힘겹게 견디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톰은 아랫층에서 위로 올라오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듣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파 위에 웅크려있던 소년도 스르륵 고개를 들어 톰이 향하는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좋은 아침입니- 어라, 선배?"
"손님 오셨다. 오늘 일은 대강 내가 처리할테니까 천천히 얘기 나눠."
두 사람을 위한 배려…라기보다는 그냥 단순히 소년과 있을 때의 시즈오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서 도망치는 것에 더 가깝다. 톰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의 시즈오를 사무소 안으로 밀어넣은 다음 재빨리 아랫층으로 달려내려갔다. 이제부터 시즈오와 소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자신의 후환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은 채 사라져버린 톰의 뒷모습을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바라보다가, 시즈오는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있는 것이 류가미네 미카도라는 것을 확인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즈오의 기억이 맞다면 오늘은 분명 평일이고 미카도는 라이라 학원에 진학중인 성실한 고등학생이다. 그러니 미카도는 지금쯤 학교에 있어야 정상인데- 어째서 이런 곳에 와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상식적인 것을 묻기에는 미카도의 표정에 너무나도 시커먼 그림자가 져있었기 때문에, 시즈오는 그 질문을 제쳐두고 우선 미카도가 앉아있는 소파의 옆자리에 앉았다. 미카도는 누군가에게 호된 벌을 받은 아이처럼 웅크린 채 고개만을 들어 시즈오를 바라보았다. 시즈오는 그 눈동자가 터무니없이 우울하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다.
"왜 그래? 미카도."
새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건다. 손이 머리카락에 닿은 순간 흠칫 몸을 떤 미카도는 시즈오의 질문을 듣고도 한참동안징수소의 바닥을 향해 눈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시즈오는 아무 말 없이 미카도가 입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한참동안 그렇게 웅크리고있던 미카도는 어느 순간 시즈오의 몸에 안겨들었다. 안겨들었다, 기 보다는 달라붙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까. 그 과정에서 지지대를 잃은 미카도의 가방이 털썩이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시즈오는 일순 깜짝 놀랐지만- 곧 미카도의 행동에 따라 그 자신도 미카도의 몸을 껴안았다. 부서지지 않도록 살짝 껴안은 자신의 두 팔과 품 사이에서 느껴지는 미카도의 몸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카…."
"꿈에서."
시즈오가 소년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흘러나온 미카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작아서 금방이라도 침묵에 짓눌리고 바람에 날려가버릴 것처럼 가볍다. 시즈오는 자신이 입을 다물고 미카도의 말을 들어줘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동안은 다만 떨리고있는 등을 쓸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죽였습니다. …시즈오씨를."
꿈에서 사람이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루시드 드림, 해석하자면 자각몽이라는 녀석이 있긴 하지만 그런 것을 자유자재로 꿀 수 있는 사람은 전세계 인구와 비교에 보면 절대소수에 가깝고- 미카도는 대개의 경우 다수의 편에 속하는 소년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꿈 속에서 자신이 헤이와지마 시즈오라는 남자를 죽여버리는 모든 과정에 대해서 조금도 간섭할 수 없었다. 같은 맥락에서 꿈 속의 자신이 헤이와지마 시즈오라는 남자를 죽이면서 느꼈던 희열이나 쾌락같은 감정도 억제할 수 없었다. 오직 연극의 관람석 같은 어긋난 위치에서, 자신의 꿈이 끝나길 빌면서 그 악몽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침의 일정시간에 맞춰둔 알람시계의 울음소리로 인해 악몽에서 겨우 깨어난 미카도는 그 꿈을 잊었다. 각성과 동시에 꿈의 내용을 잊어버리는 것 쯤은 흔히 있는 현상이다. 거기에서 끝났더라면 미카도는 지금쯤 학교에서 키다와 앙리들에게 '안 좋은 꿈을 꿨는데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하며 1교시 수업이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교복을 입고 아침을 먹은 뒤 가방을 반쯤 걸친 상태에서 시간이 조금 남았음을 깨닫고 사과라도 깍아먹을까 하던 미카도의 손에 쥐어진 과도 때문이다.
과도를 쥔 순간, 미카도는 자신이 꿈에서 그것을 쥐었다는 것을 문득 떠올렸다.
과일의 껍질을 깍는다는 평화적인 목적이 아니라, 누군가를 죽이려는 목적으로 쥐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꿈 속이라고는 하지만 한 점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를 죽였던 것인가를 떠올린 순간.
(아무리 그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걸 알고있어도)
미카도는 이 장소로 뛰어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미카도의 띄엄띄엄한 목소리를 들으며, 시즈오는 침묵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끝낸 미카도는 아무 말 없이 시즈오의 어깨 한편에 머리를 묻고있었다. 이야기를 거듭하는 동안 흐트러진 호흡은 마치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아이처럼 위태롭다. 실제로도 미카도의 얼굴이 닿아있을 왼쪽 어깻죽지가 조금씩 젖어들어가는 감각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시즈오는 선글라스 아래로 보이는 연인의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등을 쓸어내리던 손으로 미카도의 얼굴을 위쪽으로 들어올렸다. 눈동자 속에 맺혀있던 우울함에서 스며나온 눈물방울이 중력을 따라 눈가에서 볼쪽으로 흘러내리며 시즈오의 손가락을 적셨다. 미카도의 말을 아무리 들어도 분노하지 않는 시즈오지만 어째서인지 그것만큼은 조금 부아가 치밀었다. 어째서인지는 자신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미카도."
"………네."
"나는 누군가에게 죽을 정도로 약하지 않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알고있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또 눈물이 흘러넘친다. 그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을 굳게 신뢰하고 있으니까 그 꿈이 두렵게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시즈오가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것은 당연하게 알고있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만큼은 다정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런 꿈과 같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상황이 도래하였을 때, 시즈오가 정말로 자신의 손에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죽어주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있는 것일까(애초에 전제부터가 이루어질 수 없지만)?
미카도의 머릿 속을 읽어낸 것처럼, 시즈오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댄다.
서로의 눈동자가 들여다보일 정도의 거리.
"너에게도, 죽지 않아."
"제가, 시즈오씨를, …죽이려 해도?"
"…그래."
말의 침묵은 짧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침묵에 숨겨져있는 진의를, 미카도는 애써 파헤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구나. 시즈오씨는 만약에 내가 당신을 죽이려한다고 해도 결코 지지 않아. 단지 그 사실만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며 모든 의혹을 파묻어 버린다. 애초부터 일어날 확률조차 희미한 그것을 기억의 파편 속으로 매장시켜버리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여태껏 미카도의 가슴 속을 괴롭히고 있던 두려움과 절망, 우울함들이 그와 같은 비율의 안심과 희망, 기쁨같은 것들로 성질을 바꾸었다. 변덕스럽다면 변덕스러운 변화지만- 지금 그것을 두고 무어라 할 인물은 아무도 없다.
"…아아, 다행이다."
간신히 그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얼굴에 여전히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상태에서의 그 웃음은 본인이 기뻐서 짓는 표정임에 틀림없을 텐데도 이상할 정도로 서글프게 느껴졌다. 시즈오는 미카도의 웃음에 맞춰주려했지만 어째서인지 가슴이 조이는 듯한 감각때문에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조여드는 듯한 감각이 안타까움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시즈오의 등 뒤로 둘러져있던 미카도의 손이 그의 얼굴에서 선글라스를 벗겨냈다. 인위적인 색이 한겹 떨어져 나간 시야 속에서 미카도가 아까 전과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 안도의 미소라기보다는 무언가를 간신히 떨쳐낸 뒤에 지을 법한 위태로운 웃음.
…먼저 입을 맞춘 것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몇 번이고 키스를 거듭한 다음에서야, 미카도는 울음을 터뜨렸다.
시즈오는 그 몸이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껴안으며 또한 자신이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어젯 밤, 자신이 목졸라 죽였던 류가미네 미카도의 모습을.
'…바보같은 우연, 이다.'
혼잣말은 결코 바깥으로 꺼내어지지 않는다.
시즈오는 익숙하게 말을 씹어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