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마비노기

밀레시안 죽다

Mikyel 2017. 12. 14. 20:02
일전에 보았던 용사 죽다,의 밀레시안 버젼.(PV 영상 링크 : youtu.be/mG5V6MObUiQ)

 

부제는 뭐... I CAN (NOT) FORGIVE THIS WORLD. 라는 느낌.
=
#.END

 


 

-…….

 


 

-……씨.

 


 

-…밀레시안씨…. 들리세요?

 


 

-부탁이에요…. 제발 눈을 떠주세요.

 


 

눈물에 젖은 목소리에 이끌리듯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새하얀 머리, 바다처럼 파란 눈을 한 소녀의 얼굴이었다. 비록 내 얼굴의 오른편에서 튀어나와있는 각도긴 하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모래를 삼킨 것 처럼 까끌까끌한 목으로는 입술을 움찔대는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걸로 충분했던 모양인지 깊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이 드셨군요. 다행이에요.

 


 

다행, 이라는 말의 울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녀의 표정에 그림자가 진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있어? 혹시 무릎에 올려둔 내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그래? 나는 그렇게 물으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 뿐만 아니라 팔다리에도 감각이 희미하다. 나는 몸 여기저기를 한참 움찔거린 뒤에야 내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이계신과의 싸움.

 


 

처절한 싸움이었다. 수많은 장애물을 부수고 뛰어넘으며 기사단과 함께 신성력을 사용하여 사도와 선지자를 쓰러뜨렸다. 마치 어둠이 쉭쉭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던 이계신과 조우하여,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다시 한 번 고쳐잡은 것도 기억한다. 나는 새하얀 팔라딘의 갑옷을 두르고, 반신의 힘을 빌어 브류나크를 손에 쥔 채 다른 기사단원들과 함께 내 안에 있는 모든 신성력을 끌어모아 이계신에게 달려들었고….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나오를 바라본다. 나오의 호수같이 잔잔한 눈빛에 파문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생각해보면 나오는 타르라크나 루에리의 이야기를 할 때 조차 이렇게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실패한건가? 나는 지고, 내노라하던 기사단원들조차 이계신을 되돌려보내지 못하고 패배하고 만건가? 나의 초조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나오가 입을 열었다.

 


 

-밀레시안님께서 싸우시던 상대…. 이계신은 힘을 잃고 에린에서 떠나갔어요. 기사단 분들과 밀레시안님께서 직접 문을 닫는 의식까지 마치셨으니 이제 에린에 이계의 존재가 침입할 일은 없을 거에요.

 


 

"……의식…. 내가…?"

 


 

-네. 어쩌면 기억나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에요. 

 


 

그런가. 나오가 이런 걸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기억은 좀 애매하지만 아무튼 그 이계신인지 뭔지는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이제 그런 존재가 침입할 일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뻐해야할 일일텐데 좀처럼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나는 마른 침을 몇 번 삼켜 목을 억지로 풀고 좀 더 긴 말을 뱉었다.

 


 

"그런데… 난… 왜 여기… 있어?"

 


 

그 말에 나오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설령 내 눈 앞에서 호수가 반으로 갈라진다 한들 이보다는 덜 충격적일 것이다.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내가 바쁘게 눈만 깜빡이는 동안 나오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밀레시안님은… 밀레시안님께선, 분명 믿기 힘드시겠지만….

 


 

-이계신과의 싸움 직후, 목숨을 잃으셨어요.

 


 

"……뭐?"

 


 

-죄송해요. 제 잘못이에요. 밀레시안님의 몸 속에 쌓인 이계의 힘이 밀레시안님과 소울 스트림 사이의 연결을 부식시키고 있다는 걸 알고 어떻게든 멈추려 했는데… 결국 성공하지 못했어요.

 


 

성공하지 못했어요. 나오의 말이 무겁게 메아리 친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 있잖아. 나오의 곁에 있잖아. 이 하얗고 조용한 공간은 분명 소울 스트림이라고. 그런데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거야? 내 의문에 답하듯 나오가 말을 이었다. 

 


 

-여기는 숨이 끊어지신 밀레시안님을 제가 억지로 붙잡으면서 생긴 일종의 정신 세계에요. 연결이 끊어진 밀레시안님을 소울 스트림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이런 수를 쓸 수 밖에 없었어요.

 


 

말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이런 말도 안되는 농담은 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나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오는 이런 장난을 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저 얼굴에 떠오른 슬픈 그림자가 모든 말이 진실임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나는. 대체.

 


 

-왜…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저도 모르겠어요. 밀레시안님께선 에린을 위해 많은 일을 해주셨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나오의 얼굴에서 떨어진 눈물방울이 내 뺨에 닿는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렇게 울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감정이 꽉 들어찬 가슴에서 슬픔만을 솜씨좋게 빼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런 짓을 시도라도 했다간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내가 송두리째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서서히 내 심장을 찌르기 시작하는 공포와 뺨을 타고 흐르는 나오의 따뜻한 눈물을 느끼며 느리게 물었다.

 


 

"연결을… 소울 스트림과의 연결을 다시 해보면 어때? 응? 나오."

 


 

-이미 여러 번 시도해봤지만… 실패했어요. 이러다 밀레시안님의 영혼을 놓칠 것 같아 급하게 제가 개입한 거구요. 하지만 이것도 길어야 닷새 정도면 한계를 맞이할 거에요.

 


 

"그럼 그 닷새가 지나면…."

 


 

다음 말을 꺼내는 데에는 이계신을 상대할 때보다도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죽어?"

 


 

혀가 굳어 발음이 이상하다.

 

나오는 웃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울 스트림과의 연결이 끊어졌기에, 밀레시안님이 가지셨던 힘은 서서히 사라져가기 시작할거에요. 육체의 시간도 걷잡을 수 없이 흐르면서 마지막에는 노인이 되어버리시겠죠…. 

 


 

"……."

 


 

-제가… 잔인한 일을 해드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에린을 위해 많은 일을 해오신 밀레시안님이 허무하게 사라지시는건 원하지 않았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갖은 힘을 다해 이계신을 물리친 뒤 맥없이 죽는 것과 닷새간 힘도 잃고 젊음도 잃은 채 늙어가다 죽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비참할 지 저울질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나의 '삶'이 닷새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 후에는 죽음이 나를 맞이하러 올 거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저릿한 손끝을 꽉 쥐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실 시간이네요. 혹시 너무 힘드시면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언제든지 올테니까요. 그럼….

 


 

나오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눈 앞의 풍경이 물에 번진 것처럼 일그러져간다. 내가 울고있는걸까, 아니면 나오의 눈물이 나의 눈가로 떨어진 걸까. 뭐가 뭔지도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을 맴돌던 나는 문득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다. 하지만 천장이 아닌 주변을 돌아보니 거기에는 퍽 익숙한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여기는 알반 기사단의 치료소다. 내가 다쳐서 온 적은 없지만 주변 인물이 다쳐서 이쪽으로 오는 바람에 몇 번 걸음한 적이 있는 장소. 아마도 모든 일이 끝나고 쓰러진 나를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 데려와 눕힌 거겠지. 시험 삼아 몸을 움직여보니 아프거나 당기는 부분 없이 자연스레 움직인다. 나오가 마지막 힘을 다해 내 몸을 치료해 준 것일까? 하지만 이 몸은 5일이 지난 뒤 힘을 잃고 늙어버린 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계신이 사라지고, 열려있던 문이 닫히고, 이걸로 위협은 사라졌다며  이제야 모두가 안심한 이 세계에서.

 

…아직 당신이 있는 이 세계에서.

 


 

그 순간 어떤 목소리 하나가 되살아났다. 내가 이계신과의 긴 전투 끝에 거의 다 소모되어가는 신성력을 간신히 긁어모아 내려꽂기 직전 갑자기 주변의 모든 소리가 쥐 죽은 듯 사라지며 들려왔던 목소리. 그건 내가 여지껏 만난 모든 인물의 목소리를 닮은 듯 하면서도 그 중의 누구와도 닮지 않은 울림으로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어리석은 자여, 너와 나는 같은 운명이다.)

 

(우리가 사라질 때 세계는 완성의 때를 맞이한다.)

 

(너는 네가 사라진 뒤에 영원히 행복해질 이 세계를 용서할 수 있느냐?)

 


 

창문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시트 위에서 하얗게 빛났다.

 

나는 부드러운 손바닥을 쳐다보다 얼굴을 감싸쥐었다.

 


 

#.START

 


 

=

마왕을 쓰러뜨린 뒤로도 문제투성이인 원작과는 달리 에린에는 그렇다 할 문제점이 산재해 있지는 않지요. (있어도 밀레시안이 다 해치워 버렸으니) 그래서 여태껏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던 밀레시안이 힘을 잃는 것은 물론 늙어가게 된다면 어떨까 생각해봤습니다. 거기다 이게 만약 완성된 세계를 위해 이계의 존재를 지우기 위한 아튼 시미니의 계획이라면…하는 무리수도 약간 섞어서.

따라서 주된 루트는 노인이 되어가는 밀레시안과 다난 사이의 관계, 그리고 마지막 장례식으로 이어지는 '용서'지만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봉인했던 문을 도로 열어버리거나 사도/이계신이 되는 (혹은 누군가를 죽여버리는) '복수'루트도 존재한다는 뇌내설정입니다. 모두 함께 최후의 5일간 다난들을 공략하거나 세계에 파멸을 가져와봅시다! 아, 둘 다 싫으면 그냥 나오 불러서 닷새 지나기 전에 연결 끊어달라고 하는 소멸 엔딩도 있으니 자유롭게 선택해주세요. 그럼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