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로그/제왕의 별 1기(2017)
11세 바캉스 로그
Mikyel
2017. 12. 12. 11:23
"비보라, 샌드위치는 어떠니? 주방장에게 실력을 발휘해달라고 했단다."
"무척 맛있어요 숙모님.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후, 장하기도 하지."
마차로 얼마간 달려 도착한 봄의 들판에는 색색의 꽃들이 가득 피어있다. 가지런한 삼각형으로 잘린 샌드위치 하나를 오물거리며 비보라가 먼 들판을 바라보는 동안, 하얀 모자 두 쌍이 활발한 웃음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눈 앞을 재빠르게 가로질러갔다.
"엘리제, 이사벨! 숙녀가 그렇게 소리 높여 뛰어다니면 어떡하니! 모자도 다 뒤집어지잖니!"
"지잔니!" "지잔니!"
마지막 말만 잽싸게 나꿔채 나란히 말하고는 또 요란하게 웃으며 저편으로 달려간다. 긴 머리를 우아하게 올려 고정한 도렐 부인은 그 모습을 쭉 지켜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누굴 닮아서 천방지축인지 원. 저 아이들이 널 반이라도 닮았으면 좋겠구나."
"엘리제와 이사벨은 아직 어린걸요. 사이좋아 보여서 보기 좋네요."
"너무 좋아서 탈이란다. 글쎄 일전에는 말이지…."
쌍둥이는 어디로 갔는지 웃음소리만 들린다. 도렐 저택에서 있었던 일들과 사교파티에서 오고간 여러 가문의 근황을 말해주던 도렐 부인은 목이 말랐는지 자신의 곁에 놓아둔 찻잔을 기울였다. 그에 맞춰 차를 한 입 머금은 비보라는 안에서 퍼지는 부드러운 과일맛에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부드러운 봄바람 사이로 꽃내음이 진했다.
"이렇게 너와 피크닉을 나올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게다가 에스트레야에 뽑히기까지 하다니…. 넌 이 도렐 가문의 자랑이야. 사교 파티를 열면 모든 사람들이 네 소식을 궁금해한단다."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인걸요. 도렐 가의 일원으로서 앞으로의 과제도 우아하게 완수해보이겠습니다."
"어머나, 기특하기도 하지."
도렐 부인이 눈가를 접으며 웃는다. 그 미소를 따르려하던 비보라는 어느새 피크닉 자리 근처까지 돌아온 쌍둥이가 이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켰다. 엘리제와 이사벨이 갑자기 얌전해진 모습을 보고 방심하는 건 갓 도렐가에 들어와 아무것도 모르는 고용인들 정도다. 뒤늦게 두 아이를 발견한 도렐 부인의 목소리도 풀을 먹인 천 마냥 빳빳해졌다.
"엘리제, 이사벨. 거기서 뭘 하고 있니?"
"아무것도 안 해-." "맞아, 얌전하게 앉아있어!"
"누가 속을 줄 아니? 모자는 왜 벗었어? 안에 뭔가 숨기고 있는거구나? 어서 이쪽으로 보이렴!"
찻잔을 소리나게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선 부인이 바구니를 빙 돌아 아이들에게로 다가간다. 비보라는 어쩐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얀 모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안에서 뭔가가 분주히 움직이는 것 같은데, 설마?
신은 매정하고 시간은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 법이라, 쌍둥이는 비보라나 자신들의 어머니가 뭔가를 각오하기도 전에 자랑스레 모자 속을 내보였다. 안에는….
"짜잔, 사마귀!" "짜잔, 개구리!!"
평온한 봄 들판에 느닷없는 비명이 울려퍼진다. 부인이 도렐 가문의 오랜 체면을 불사하고 긴 양산을 들어 도망치는 쌍둥이들을 쫓는 동안, 비보라는 생경한 생물을 본 탓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한 손으로 꼭 누르고 평원 속으로 사라져가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시, 실물은 처음 봤어...."
바람을 타고 온 꽃잎이 그런 일도 있는 거라는 듯 허공에서 팔랑이다 찻잔 위로 살짝 내려앉았다.
"현상수배범을 쫓았다며? 폐하도 참, 아무리 에스트레야라곤 하지만 흉흉한 일을 맡기시는군. 몸이 상하지는 않았어?"
낙엽이 붉게 물든 가을, 테이블에는 솜씨좋게 만들어진 과일 타르트와 밀크티가 놓여있다. 비보라는 자신이 쓴 챙 달린 모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신경쓰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행여 가을 찬바람이 새어들어가지 않도록 어깨에 걸친 숄더 끝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제가 도착하기 전에 다른 후보들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해요. 또 직접 쫓는게 아니라 경비대를 돕는 정도였구요."
"어쨌건 위험한 일이었어. 만약 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아버지는 둘째치고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우실걸?"
두 분 다 너를 친자식처럼 여기시는 분이니까. 덤덤한 말은 테이블 위에 비스듬히 걸쳐진 나무 그림자마냥 당연하였고 비보라는 입 안에 고인 밀크티를 음미하다 그대로 삼켰다. 작은 목구멍에선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숙부님과 숙모님에겐 늘 감사드리고 있어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분들의 은혜만 입을 수는 없으니까요."
"비보라, 너는 이제 겨우 11살이야.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서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가는게 당연하지. 그걸 은혜 운운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 자의 마음가짐을 의심하겠어."
아리스티드의 말은 언제나 맺고 끊음이 정확하다. 도렐 가 가주의 장남이자 언젠가 가문을 이어받을 이로서 착실히 교육받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자신도 그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3년후의 자신을 그려보려던 비보라는, 어쩐지 머리가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어 그만두었다.
"아무튼… 너무 무리는 하지 마. 네가 모든 일에 열심이라는건 우리 가족들 모두 잘 알고있으니까."
"네, 마음씀씀이에 감사드려요. 아리스티드 오라버니. 하지만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할 거에요."
꼴사나운 모습은 보여드리지 않을 테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마음 속에서 문득 떠오른 말은 너무나도 적나라하여 도저히 혀끝에 올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신 비보라는 타르트를 한 조각 입에 넣고는 무척 맛있다며 미소지었다.
쌍둥이는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정원 낙엽 투어를 끝내고 돌아왔다. 언니가 생각나서 고르고 골라 주워왔다는 단풍은 당연히도 붉은 색이었다. 책에 끼워서 말리면 예쁘겠지? 쌍둥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었고 비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붉은색이 강렬하게 들어오는 가을날이었다.
"비보라양, 선발식에서의 활약 잘 전해듣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기품있고 우아한 행동으로 만인의 모범이 되어주길 바래요."
"네, 말씀 감사합니다."
"어머, 당신도 참. 벌써 어엿한 숙녀나 다름없는 분에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늘은 이분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이지, 감히 충언을 드리는 날이 아니랍니다. 미안해요, 비보라양. 이이가 워낙에 성정이 딱딱해서."
"아뇨, 괜찮습니다. 이렇게 걸음해주신 것 만으로도 저는 기쁩니다."
"비보라양... 몸은 이제 건강한가요? 당신 옛날에는 자주 앓고 쓰러지곤 했었잖아요. 에스트레야 선발식 도중에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그 얼마나 큰 소동이겠어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담. 에스트레야이기 이전에 도렐 가를 대표하는 자로서 몸의 관리는 누구보다 엄중하게 하고 있으니 심려치 말아주세요."
"오오, 비보라양! 여기 있었군! 자자, 거기 서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다른 후보들의 이야기를 좀 해주지 않겠나? 유력한 가문의 자식분들도 계시다던데!"
"네, 후보분들은 1차 선발식을 통과하신 만큼 모두 실력과 바른 마음가짐을 가진 분들이셨습니다. 곁에 함께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저도 나날이 수행에 힘쓰고 있습니다."
"비보라양, 이번에 에스트레야들에게 현상범을 잡는 과제가 주어졌다면서요? 설마 도전할겁니까? 기품 있는 아가씨에게는 다소 벅찰 것 같은데."
"저는 기꺼이 그 과제를 수행할 것입니다. 에스트레야로서 주어진 과제에 등을 돌리고 모른 척 할 수는 없으니까요."
"공동묘지에서 수상한 인기척이 있다는 소문도 에스트레야들이 맡고 있다면서? 들리는 말로는 그곳에 유령기사가 있다던데. 나라면 도저히 가고싶지 않을거에요. 대단하네요, 비보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제가 해야할 일을 다할 뿐이에요."
"그런데 만약 비보라양이 에스트레야 후보도 아니고, 굳이 현상범이니 유령기사니 하는 것을 잡아야 할 과제도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흉흉한 곳으로 가셨을 건가요?"
"그건…"
"어마, 이상한 질문을 하시네요? 비보라양은 숙녀세요! 그런 수상쩍은 곳에 가느니 우아하게 차를 마시거나 자수를 놓는 편이 더 좋으실게 당연하죠!"
"……저."
"아니, 하하하. 그렇지만 도렐 가문의 붉은 머리카락이라고 하면 그 샹젤린 여사지 않습니까. 어쩌면 에스트레야가 되지 않았더라도 비보라 '샹젤린' 도렐 양은 조모님의 피를 이기지 못하고 적을 물리치러 나섰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어휴, 이분은 정말 실없는 소릴 잘 하신다니까. 비보라양, 저런 사람이하는 말일랑 신경쓰지 말아요!"
"하하하. 후보님에게 그렇게 아무 말이나 했다가 나중에 찬 바람 맞아도 난 모르는 일일세."
"이거이거, 제 농담은 영 먹히질 않는군요. 아무튼 당신에게 기대하고 있는건 사실입니다, 비보라양. 모쪼록 앞으로 건투해주세요."
"자자, 이럴게 아니라 모두 함께 건배하지요! 오늘로 12번째 생일을 맞이한 비보라 후보님과 앞으로의 영광을 위해!"
=
겨울 호수 주변은 눈이 쌓여 적막했다. 비보라는 여러가지 소리가 아직도 메아리치는 귓가를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내렸다. 하얗고, 정적이고, 무채색인 공간을 응시하고 있자니 제 몸에 붙어있던 온갖 것들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다만 머릿 속에 들어온 목소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비보라. 여기 있었구나."
그런 부름을 듣고도 세 발자국이나 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릴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게냐?"
"아… 아, 숙부님. 죄송합니다. 오시는걸 미처 듣지 못했어요."
"하하, 괜찮다. 저도 모르게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지 않느냐."
호수 너머에는 하얗게 뒤덮인 산이 있다. 호수 주위에는 한때 푸르게 우거졌을 듯한 나무 몇 그루가 새까만 실루엣만 남긴채 서있다. 동그란 덩어리는 바위겠지. 흐리게 얼어붙어있는 수면 위로는 물고기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먼 하늘에 겨우 구름 몇 조각만 흘러가고 있을 뿐. 이게 어떻게 아름답다는 걸까. 비보라는 문득 그런 의문을 품었으나 입은 열지 않았다. 숙부님이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것이다.
"이렇게 보고있으면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지만, 언젠가 봄이 오면 이 눈은 녹아 사라지고 수면은 찰랑이며 새잎이 돋아나겠지.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늘 흘러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작지만 큰 기적을 일으킨단다. 작은 몸으로 요람에 누워있던 네가, 이렇게 건강히 서있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전부 숙부님과 숙모님의 덕택입니다."
"너를 낳은 네 부모의 기적이기도 하지."
비보라의 생일 파티에 모인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친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화려한 샹들리에와 음료수, 환담과 웃음소리 사이에 마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자들을 끌어들여봤자 아무 재미도 득도 없기 때문이다. 비보라는 딱히 제 친부모를 두고 재미없다거나 쓸모없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정작 그들의 화제를 앞에 두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주가 상대의 침묵을 헤아려 어루만질 줄 아는 이였던 것이 다행이었다.
"너의 삶은 한 순간 한 순간이 기적이란다. 너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지. 무의미한 순간 따위는 없다.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쓸모없는 경험도 없어. 후회없이 인생을 살거라, 비보라."
"네, 숙부님. 마음에 새겨두도록 하겠습니다."
내뱉은 말이 눈밭에 떨어져 동그란 자국만 남기고 사라진 것 같았으나, 비보라는 굳이 고개를 숙여 땅을 보진 않았다.
고요한 호수도 몸 한번 뒤척이지 않는 오후였다.